흔들릴 때 돌아가야 할 곳, 침묵이라는 이름의 울타리

[필사 488일]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73

by 서강

비가 오는 날이면 꼭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초등학교 때였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책가방을 머리 위에 얹고 골목을 달렸던 그날.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저 멀리 우리 집 불빛이 보였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몸에서 빠져나가던 긴장감, 젖은 양말을 벗으며 느꼈던 그 안도감. 그때 나는 몰랐다. 그게 단순히 '집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나를 온전히 돌려받는 경험이었다는 것을.


어른이 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집을 향해 달린다. 다만 이제 그 집은 훨씬 더 비싸졌고, 훨씬 더 멀어졌다. 청약 통장을 들여다보고, 대출 한도를 계산하고, 평생을 바쳐 겨우 한 채를 얻는다. 그렇게 번듯한 집은 생겼는데, 이상하게도 돌아갈 곳이 없다는 기분은 왜 여전한 걸까.


버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스쳤다.

몸이 쉴 집은 있는데, 마음이 쉴 집은 어디에 있지?


헤르만 헤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대의 마음 깊은 곳에 고요한 산장과 같은 장소를 준비해 둬라. 곤란한 일이 생겼거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그곳으로 돌아가 차분하게 진실한 대화를 나눠라.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솔직히 조금 막막했다. 마음 깊은 곳에 산장을 짓는다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하라는 건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그토록 어린 시절의 그 집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 집이 좋았던 건 넓어서도, 예뻐서도 아니었다. 그곳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젖은 채로 뛰어들어도, 넘어져서 울어도, 시험을 망쳐서 돌아와도 여전히 나를 맞아주는 공간. 그게 진짜 집이었다.


그렇다면 헤세가 말한 '내면의 고요한 산장'도 결국 같은 것이다. 실패한 나를, 흔들리는 나를, 확신 없는 나를 그대로 받아주는 자리. 타인의 평가가 닿지 않는 곳. 세상의 소음이 문 앞에서 멈추는 곳.


의식주(衣食住) 중에서 으뜸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주(住)'다. 집이 있어야 밥도 지어먹고, 옷도 갈아입고, 내일을 도모할 수 있다. 돌아갈 곳이 확실한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폭풍이 오면 문을 닫고 안에서 차를 끓이며 기다릴 줄 안다. 서두르지 않는다. 바람이 방향을 바꿔도 그 사람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반면, 마음의 집이 없는 사람은 늘 밖을 서성인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거리를 떠돌고, SNS라는 남의 거실을 기웃거리며 허기를 채운다. 가장 오래 이야기해야 할 사람, 바로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늘 뒷전이다.


그게 꼭 나 같아서, 이 대목에서 한참 멈췄다.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집을 짓기로 했다.

이번엔 내 손으로, 나만의 스타일로.


헤세가 말한 그 고요한 산장을,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나만의 요새를. 청약도 대출도 필요 없다. 이 집은 오직 나의 사색과 고요라는 벽돌로만 쌓아 올릴 수 있다.


집 터부터 다진다. 하루 딱 10분,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나만의 숨소리에 집중하는 시간. 이게 기초 공사다.

설계도를 그린다. 세상이 좋다고 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진짜 지키고 싶은 것 하나를 찾는 일. 이게 이 집의 뼈대가 된다.


벽돌을 쌓는다. 매일 한 줄의 필사, 잠들기 전 하루를 조용히 돌아보는 시간. 이렇게 조금씩, 보이지 않는 공간이 넓어진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자.

수십 명과 대화하고, 수백 개의 알림에 응답하고, 수천 개의 이미지를 스쳐 지났다. 그런데 그중에서 진짜 나와 나눈 대화는 몇 마디나 됐을까.


온 우주를 담은 내 몸속 어딘가에, 마음을 터놓고 쉴 수 있는 자리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번듯한 집을 갖는 것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폭풍우 속에서도 나를 온전히 지켜줄 마음의 집을 짓는 것이다.


지금 당장 대단한 걸 할 필요는 없다. 마음 깊은 곳에 작은 창 하나를 내고, 고요한 의자 하나를 놓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의자에 앉아 나 자신과 나누는 진실한 대화 한 마디가, 그 어떤 지도보다 선명하게 당신의 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오늘, 당신의 마음속 산장은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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