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마중 나가지 않기로 했다

죽음의 날을 모르기에 살 수 있다.

by 서강

[필사 493일] 있다고 다 보여주지 말고 안다고 다 말하지 마라 /#02


남편의 기일이다.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여전히 그는 나의 추억 속에만 머물고 있다. 예고도 없이 그를 먼저 떠나보낸 뒤, 나는 한동안 삶의 가장자리를 서성였다. 상실의 시간은 달력의 숫자와 상관없이 문득문득 발목을 잡곤 한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토록 선명하게 내 일상을 파고들 줄은 몰랐다. 하지만 슬픔의 심연에서 나를 건져 올린 건 역설적이게도 ‘살아있음’의 감각이었다.


몇 해 전, 지독한 고소공포증을 무릅쓰고 딸들과 구례에서 패러글라이딩에 도전했다. 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덜컹거리는 롤러코스터 같았고, 절벽 끝은 진퇴양난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눈 딱 감고 허공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죽음이라는 확정된 결말을 미리 마중 나가느라 오늘이라는 축제를 망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세상에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으니, 그저 주어진 삶을 탐닉하라고. 우리는 모두 순번을 알 수 없는 대기표를 쥐고 산다. 그 번호를 미리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망각이라는 축복 속에서 오늘을 충실히 살아낼 수 있다. 죽음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그전까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 또한 공평하게 열려 있다.


망설이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고 나면, 그것은 단순한 경험을 넘어 평생 소환할 수 있는 단단한 추억이 된다. 남편이 머무는 추억의 방을 소중히 간직하되, 나는 오늘 내게 허락된 바람과 하늘을 더 열렬히 사랑하기로 했다. 어차피 올 것은 온다. 그러니 굳이 슬픔을 앞당겨 맞으러 나가지 말자.


순리대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떠난 이가 남겨진 이에게 바라는 가장 간절한 바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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