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들에게 줄 유산
무심코 살아온 날들이 지나고 보면 하나의 유산이 된다. 178일째, 새벽 창가에 앉아 펜을 든다. 말로는 전하지 못할 것들이 등에 담긴다.
"엄마, 나도 필사할래. 책 사줘."
막내의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치던 그날, 뒤에서 들려온 발걸음 소리. 고개를 들기도 전이었다. 이에 뒤질세라 잠시 집에 다니러 온 큰 딸이 필사노트를 집어 들었다. 손끝으로 노트를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
"책 표지 진짜 예쁘다. 나도 필사할래."
그 순간 마치 오래된 샘물이 겨우내 얼어 있다가 봄기운을 받아 녹기 시작하는 것처럼,
'옳거니, 드디어 걸려들었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봄빛이 서린 "살아갈 날들을 위한 괴테의 시" 책 표지를 어루만진다. 김종원 작가님의 세계 철학 전집 "나의 현재만이 나의 유일한 진실이다"를 시작으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까지 완성한 필사 노트들이 책장에 차곡차곡 쌓인다. 이른 아침, 내 손끝에서 타인의 문장이 내 것이 되어가는 순간들이 기록으로 쌓이고 있다.
사실 나는 아이들에게 필사를 하라고 말해본 적이 없다. 시키면 더 하기 싫어지는 나의 성향이 아이들에게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인들이 하나둘 필사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아이들도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지만, 묵묵히 행동으로만 보여줬다. 여행 중에도, 아들 결혼식 당일에도 빠뜨리지 않고 펜을 들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스스로 다가왔다. 필사는 그렇게 전염됐다. 천천히, 깊게, 행동은 말(言) 보다 강하다.
어버이날 아침, 큰 공주에게서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엄마가 준 책으로 요즘은 그래도 매일 필사를 하고 있어. 요즘은 느끼는 게 많은 것 같아."
그 문장을 읽는 순간, 화면을 보던 손가락이 떨렸다. 그 어떤 선물보다 깊은 울림이 밀려왔다. 한동안 답장을 쓰지 못했다. 단 한 번의 행동이 백 마디 말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그날 또렷하게 깨달았다. 백문이 불여일필.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가정예배로 마음밭을 일궜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제 길을 가는 걸 지켜보며 생각한다. 부모가 평생 곁에 있어줄 수 없기에. 내면이 단단해야 예고 없이 찾아오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이 작은 씨앗이 아이들의 삶에서 꽃이 되기를,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펜을 들 수 있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필사하는 엄마로 기억되고 싶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필사의 유산을 남기리라, 거룩한 욕심을 부려본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 말씀이 떠오른다. 매일 아침 책상에 앉아 필사하는 순간들이 밀알이 되어 아이들의 마음에 싹을 틔운 것이다.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의 필사노트를 펼친 우리 가족. 펜이 종이 위를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온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 우리는 필사 가족으로 거듭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