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드러내야 치유가 된다.
제주도 숙소 거실의 창문에 빗방울이 흩뿌려질 때, 우리 세 사람의 마음속에도 오랜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딸들과 나, 우리는 그곳에서 꼭꼭 숨겨둬 곪기 시작한 상처를 드러냈다. 일상에선 결코 열지 못했던 상자를 여행이라는 낯선 공간이 열어젖힌 것이다.
"엄마, 아빠가 떠나기 전 그때, 매일 밤 옥상에 올라가서 울면서 기도했어. 아빠랑 같이 살게 해 달라고."
큰 공주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내 귓가에 맴돌며 심장을 멎게 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잠시 사라졌다. 머릿속은 하얀 백지가 되었다. 아들 문제로 부득이하게 잠시 주말 부부로 지내고 있을 때였다.
"그때 아빠한테 말하지 그랬어?"
목소리가 떨렸다. 딸은 한참을 말없이 바닥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아빠가 힘들어할까 봐 말을 못 했어."
가슴이 소금을 뿌린 듯이 쓰라린다. 제주의 초록빛 풍경이 흐릿해졌다. 숙소 창문으로 보이는 먼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린것이 얼마나 아빠가 보고 싶었으면, 그동안 가슴에 묻고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빠가 이 말을 듣고 미안하다고 말을 해주면 좋으련만, 듣고는 있겠지만 우리에게 들리지 않으니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다.
방 안에는 오랜 침묵이 흘렀다. 우리 각자의 호흡만이 조용히 들렸다. 어떤 말도 그 순간을 채울 수 없었다. 여행 전날 밤, 가방을 싸며 나는 이런 대화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제주도의 바다를 보며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려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행은 우리에게 다른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낯선 공간은 일상에서 감히 꺼내지 못했던 상처들을 끄집어내는 힘이 있다. 제주의 바람소리, 숙소의 아늑한 조명, 그리고 우리만의 시간.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상처를 꺼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었다. 상처는 감추면 더 깊어진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 더 많은 상처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상처를 드러내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벗어난 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아프긴 했지만, 그 상처를 함께 바라보는 순간 치유가 시작됐다. 상처는 꺼내야만 치유된다는 것을, 그 상처를 꺼낼 수 있는 공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오늘도 출근길에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두가 보이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누군가에게는 말 한마디가, 짧은 여행이, 혹은 작은 카페의 조용한 시간이 상처를 꺼낼 수 있는 공간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꺼낼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을 만나는 순간, 비로소 치유의 길이 열린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여기, 지금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