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13,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로 운전을 할 수는 없습니다.
조가비에서 빠져나온 아름답고
고귀한 태생의 진주가
착한 보석상 남자에게
이렇게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나는 이제 정말 틀렸습니다.
당신은 곧 내 몸에 구멍을 뚫겠죠,
그럼 나의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다 망가질 것입니다.
게다가 나중에는 천한 것들과
하나로 엮이는 신세가 되겠죠.
'그러자 보석상 남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건 당장의 이익입니다.
부디 이 마음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내가 여기에서 잔인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 존재하는 진주 목걸이나
팔찌는 생기지 않을 겁니다."
[조가비에서 빠져나온 진주]
브레이크를 밟은 채로는
그 어떤 차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종종
지금의 안전함을 놓치기 두려워
필요한 변화마저 거부한다.
진주의 슬픔이 들리는 듯하다.
"구멍이 뚫리면 내 온전함은 사라진다"
그 두려움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석상의 대답에서 더 깊은 진실을 본다.
때로는 상처가
더 큰 아름다움의 시작이 된다는 것을,
진주는 홀로 있을 때
단 하나의 빛을 품지만
실에 꿰어져 연결될 때
셀 수 없이 많은 빛의 조화를 이룬다.
우리의 삶도
그런 선택의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온전한 나 하나의 가치와
연결된 우리의 아름다움 사이에서,
나는 종종 생각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구멍들이
실은 빛이 통과하는 통로가 아닐까,
브레이크를 놓고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된다.
누군가의 평가에 기댄다는 건
자신의 창조물을 경멸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내 선택을 귀하게 여길 때
세상도 나를 귀하게 대접합니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괴테의 시 中>
다른 이의 평가에 의지한다는 것.
그것은 내 손으로 빚은 작은 별들을
스스로 짓밟는 일과 같다.
여름날, 뒤뜰에 피어난 민들레를
"잡초"라 부르는 세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그 노란 꽃송이에 이름을 지어주는 이가 되어보자.
내가 선택한 길을
내가 먼저 존중할 때
세상은 비로소 그 길 위의 나를
귀한 존재로 바라본다.
타인의 칭찬은 이슬처럼 쉬이 마르고
비난은 바람처럼 금세 지나간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깊은 존중은
오래도록 피어나는 꽃이 된다.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
그것이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는 첫걸음이다.
비가 오면 한옥카페가 생각난다.
처마밑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게 참 좋다.
아마도 어릴 적 향수 때문이리라,
한옥 카페대신 강물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것도
오늘 내게 주는 작은 선물이다.
그 마음을 종이에 옮기려 한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특히 기독교에서는
"믿습니까?"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내게 믿음이란 '안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믿음이 생긴다.
한때 나는 1주일 내내 교회에 살다시피 했다.
맹목적 신앙을 거부하고 싶었기에
성경 공부는 늘 1번으로 신청했다.
하나님과 예수님, 선지자와 12제자의
행적을 배우면서 믿음도 함께 자라났다.
그렇다면
"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내 성격, 고민, 취향, 하고 싶은 것, 마음...
내가 나를 제대로 알아야
내 행동과 글에 확신이 생긴다.
글쓰기는 내 마음을 그대로
종이에 옮기는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불순물과 거짓을 걸러내고
진심만 담으면 된다.
뒤늦게 만학도가 되어
자기소개서, 시, 산문, 서평 등
다양한 과제를 제출하며
교수님들의 평가를 받는다.
매번 느끼는 건 하나다.
'글쓰기에 정답이 있을까?'
어버이날,
엄마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싶었다.
퇴근길에 만 원을 지불하고
화분으로 된 카네이션을 샀다.
엄마 사진을 보며 그 꽃을 건넸을 때,
엄마의 미소가 내 마음에 피어났다.
이것이 내 진심이다.
강물이 강물답게 흐르듯,
나는 나답게 글을 쓰기로 다짐한다.
남의 평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 성향대로 써야겠다.
글에는 쓰는 사람의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니까,
비가 오는 금요일,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진정한 글쓰기란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이며,
그 여정에서 불순물을 걸러낸 진심만이
독자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