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갈 날들을 위한 괴테의 시, 필사 #27
1991년 5월 23일, 분만실 시계가 밤 10시를 넘겼다. 아침 7시부터 시작된 진통이 15시간 만에 끝나고, 작은 생명 하나가 세상으로 나왔다. 그 아이는 마치 이 복잡한 세상에 나오길 거부하는 듯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그 아이와 나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로 인연이 시작되었다.
필사를 시작한 지 191일째 아침을 맞고 있다. 펜을 잡고 한 글자씩 옮겨 적으며 문득 깨달았다. 안다는 것은 시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 법을 아는 사람은 법을 활용한다. 법을 모르면 조용히 지키기만 한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옛말처럼, 내가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인다. 보이는 만큼 누릴 수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발아래 펼쳐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듯, 지식은 우리의 시야를 넓힌다.
칭찬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칭찬하고 싶어도 칭찬할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상대의 작은 깨달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소중히 여겨주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능력이다.
필사를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한 명, 두 명씩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의 안목과 지성이 조금씩 높아지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솔솔 하다.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대견하고 흐뭇하다. 세계 철학 전집을 집필하는 김종원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자신의 책으로 필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삶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그의 기쁨은 어떨까.
필사는 독서와 글쓰기의 만남이다. 독서는 인풋, 글쓰기는 아웃 풋. 인체와 많이 닮았다. 먹기만 하고 배출을 못하면 살 수가 없다. 돈도 들어오면 나가야 경제가 순환된다. 모든 것은 조화가 중요하다. 필사는 산과 강이, 하늘과 구름이 어우러지듯 독서와 글쓰기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5월의 싱그러움도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햇빛이 내리쬐고,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영양분을 공급하고,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야 가능하다. 우리는 그 완성품을 대가 없이 누릴 뿐이다. 오늘도 필사를 하며 생각한다.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선물처럼 찾아온 오늘을 헛되지 않게 보내고 싶다. 34년 전 그 분만실에서 나온 작은 생명처럼, 오늘 하루도 새로운 시작이다. 필사를 통해 얻은 깨달음들이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펜 끝에서 흘러나오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내 안의 무언가를 깨우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