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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차이

영화 [줄스]와 책 <일곱번 째는 내가 아니다>를 감상하고

by 서글

펜실베이니아 외곽의 조용한 마을에 거주하는 노인 '밀튼'. 그는 시의회에 여러 안건을 제안할 정도로 자신이 거주하는 동네에 관심이 많다. 회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를 반겨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두운 조도의 집에서 조용히 저녁식사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 창밖에서 번쩍이는 빛과 함께 굉음이 들리고 뒤뜰에 무언가가 떨어진다. 잠옷 바람에 안경을 찾아 쓰고 나가보니 평생 말로만 들었던 UFO가 눈앞에 떨어져 있다. 놀란 밀튼은 곧바로 911에 신고하지만 요원은 밀튼을 믿지 못하고 나이 든 노인의 장난전화로 취급하고 만다. 다음날 밤, 뒷마당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가보니 UFO의 주인으로 보이는 작은 외계인이 문 앞에 쓰러져있다. 적개심보단 연민의 감정이 앞선 밀튼은 그를 집안에 들여 보살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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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한적한 도시 '크라이스트 처치'. 낮동안 뜨거운 열기를 내뿜던 동네에 어느덧 밤이 무르익는다. 더운 날씨에 지친 주인공 '조'는 몸을 이끌고 집으로 귀가한다. 문을 열고 곧장 냉장고로 향해 맥주 한 병을 들이켜고 위층 욕실에서 샤워 중인 '안젤라'에게 향한다.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드니 도시를 공포에 떨게 만든 살인마에 대한 기사가 기재되어 있다. 샤워기 물소리가 잦아들고 몇 분 뒤 수증기와 함께 나온 안젤라는 조를 바라보며 묻는다. "당신 누구야..?" 그 말을 들은 조는 들고 온 서류가방에서 큰 칼을 꺼내며 말한다. "아마 당신도 내 기사를 읽었을 거예요. 1면에 자주 나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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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 '살롱 드 인덕원'의 11월 주제는 코미디 SF장르 영화 [줄스(마크 터틀타웁, 2003)]와 범죄 소설 <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폴 클리브, 2025)>를 보고 공통점을 찾는 것이었다. 가벼운 코미디가 섞인 SF영화와, 피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범죄 소설의 공통점을 찾으라니. 책을 읽는 도중에는 엽기적으로 끔찍한 장면들을 마주하며 이게 영화와 연결될 수 있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막막했던 감정을 안은채 힘겹게 두 작품의 감상을 마친 후 여러 공통점을 발견했고 하나의 결론이 도출됐다.




밀튼과 조는 각자의 세계에서 일어난 진짜 경험을 말했다. 밀튼은 정말로 외계인을 봤고, 조는 정말로 여섯 번의 살인을 저질렀으며, 자신이 하지 않은 일곱 번째 사건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전혀 믿음을 얻지 못한다. 밀튼의 고백은 노인의 반복된 실수와 이상 행동이라는 ‘기존 이미지’ 때문에 즉시 치매 의심 증상으로 해석된다. 조의 고백은 경찰들의 오만한 추론과 편견 속에서 관심이 고픈 모자란 남자의 허세로 치부된다. 결국 둘은 같은 자리로 밀려난다. “누구도 나의 언어를 믿지 않는 세계에서, 나는 나 혼자 진실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사람.” 사람들은 설명 가능한 이야기만 받아들이려 하고, 잠시라도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문제’로 인식한다.


그럼에도 두 작품에는 이 고립의 세계를 뚫고 들어오는 예외적 존재가 있다. [줄스]의 샌디, <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의 샐리. 모두가 밀튼과 조를 이상하게 볼 때, 이 둘은 먼저 다가간다. 특별한 확신이나 통찰력이 있다기보다는 그들의 의견을 틀린 말이라 끊기 전에 잠시 멈추어 질문할 줄 아는 사람들로 느껴진다. 모두가 주인공들을 외면할 때 같이 돌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세계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가 그 자리에서 함께 바라보려 한다. 두 작품은 말한다. 고립을 끝내는 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단 소수의 태도였다.


이제 이야기의 결은 더 흥미롭게 흐른다. 밀튼은 외계인 줄스의 존재를 알리며 더 고립되고 더 의심받는다. 어떻게 보면 줄스가 그의 삶을 망가뜨리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줄스 덕분에 밀튼은 오랜만에 누군가를 보살피는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임을 인지하며 자존감을 회복한다. 조와 멜리사의 관계는 더 극적이다. 멜리사는 조의 정체를 처음으로 눈치챈 인물이며, 그를 궁지로 몰고, 심지어 지울 수 없는 상처까지 남긴 최악의 존재다. 그런데 결국 조가 마음을 가장 깊이 열 수 있는 인물도 멜리사뿐이었다. 두 주인공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한다. 나를 아프게 한 존재가 되레 나와 가장 정직하게 마주하게 만드는 순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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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은 장르도, 분위기도, 결도 다르지만 결국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타인을 믿기 어려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가족조차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는 세계, 진실을 말하면 병자 취급을 받는 세계, 상처와 위로가 뒤섞여 누가 나를 살리고 누가 해치는지조차 헷갈리는 세계. 밀튼과 조가 버티고 있던 자리는 이렇게 삭막하고, 잔인하고, 불공평하다. 그럼에도 그들이 끝내 붙들었던 신념은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내가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가까웠다. 믿음을 잃은 세계 안에서도, 누군가는 뜻밖의 순간에 내 말에 귀 기울여 주고, 나를 상처 냈던 존재가 되레 나를 비추는 거울로 돌아올 수도 있다. 의외의 인물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외모가 화려하다는 이유로, 혹은 들려온 소문만으로 단순하게 판단한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바라보는 만큼 세계와 가까워지고 멀어진다. 서로를 쉽게 의심하고 타인의 고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시대일지라도, 편견을 지우고 나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다시 정의한다면, 혼란에서 조금은 멀어지고, 더 단단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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