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라는 사회
중학교 때는 걸어서 5분이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통학 방식이 달라졌다. 버스를 타고 20분 남짓, 거기서 다시 10분을 걸어야 학교에 도착했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 이동 시간이 늘어났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간이 싫지는 않았다. 등하교 길은 하루 중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다른 반 이성 친구들을 가장 오래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입학통지서에 적힌 반 번호를 처음 공유하던 순간부터, 첫 등교날 맞이한 설렘과 긴장감은 반년이 지나서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학년은 열 개 학급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는 가장 끝 반인 10반에 배정됐다. 입학 첫날 교실에 들어가 보니 선착순이었는지 인기 많은 자리는 대부분 차 있었다. 귀퉁이를 좋아하는 나는 자연스럽게 1 분단과 4 분단의 맨 뒷자리를 훑어봤지만, 그 자리는 나보다 더 내향적이고 부지런한 친구들의 몫이었다. 결국 선택한 자리는 창가 쪽 기둥 옆, 시계가 걸려 있는 자리였다. 뒷자리 다음으로 눈에 띄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택을 후회했다.
처음 마주한 담임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멈춰 있는 시계를 보셨다.
“시계부터 살려야겠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교실 안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몰렸다.
“핸드폰 시계 보고 시간 좀 맞춰줄래?”
나는 짝꿍에게 시간을 물었다. 실내화를 벗고 의자 위에 올라가 시계를 걸고, 다시 내려와 실내화를 신기까지의 과정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교실은 지나치게 조용했고,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고등학교에서의 첫 기억은 그렇게, 원치 않게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장면으로 남았다. 이후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름이 적힌 명부를 돌리며 빈칸을 채워 적으라고 했다. 추후 명부를 확인한 순간 빼곡히 채워진 칸들 사이에서, 딱 하나 비어 있는 칸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반에서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형편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형편이 부끄럽다고 느꼈다. 나만 다른 세상에 떨어져 있는 기분이 싫었다. 아버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갖고 싶다는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나는 부모님을 졸라 무언가를 얻어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대신 한 달에 한 번쯤, 휴대전화를 사줄 수는 없는지 조심스럽게 여쭤보는 방식으로 타협했다. 그렇게 여름이 다가오던 어느 날, 아버지는 휴무 날 나를 휴대전화 가게로 데려가셨고 당시 유행하던 ‘베컴폰’을 손에 쥐어주셨다. 친구들 중 둘은 이미 베컴폰을 쓰고 있었고, 각각 금색과 빨간색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아이템 선택은 피해 주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기에 나는 남아 있던 남색을 골랐다.
나를 작아지게 만든 건 핸드폰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중학교까지만 의무 교육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급식비를 따로 내야 했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밤 8-9시에 끝나는 야간 자율학습이 반강제였던 터라 저녁까지 학교에서 해결해야 했는데, 점심과 저녁을 합한 급식비는 한 달에 3, 40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가족은 지원이 필요했다.
선생님은 지원이 필요한 사람은 칠판 구석에 이름을 적어 두라고 했다. 나의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반 친구들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인데 그 방식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조용히 불러 지원서를 작성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 같은 학교를 다니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친구 역시 지원을 받던 학생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그 반에서도 선생님은 똑같이 칠판에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는데 역시나 불편했다고 한다. 우리는 입이 댓 발 나온 상태로 그때의 방식과 의도에 대해 가끔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어쩌면 선생님들은 어려운 형편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가르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