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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기술이 필요한가요?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by 서글

근래 소중한 인연이 찾아왔다.

상대에게 누구보다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앞서지만 감정이 깊어질수록 갈등의 빈도가 증가하고 있었다. 서로의 세계관이 부딪히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감각적으로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감정이 술자리에서 지인들에게까지 분출되어 분위기를 해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심연에 갇힌 듯 답답하고 어두운 고뇌는 나를 조여들었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조급함만 커져갔다. 분명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기에 주변을 둘러보았고, 연애를 시작하며 선물 받은 책 한 권을 다시 펼쳐 들었다.


“인간이 분리된 채 사랑에 의해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이것이 수치심의 원천이다. 동시에 이것은 죄책감과 불안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사랑의 기술(에리히 프롬)]은 내가 느낀 불안의 정체를 또렷하게 저술해 놓았다. 그 불안은 결핍이나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사랑을 갈구하고 집단에 속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감정이었다. 고립은 인간에게 가장 본능적인 공포이고, 불안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타나는 신호였다.


돌이켜보면 사람마다 불안과 여유를 느끼는 깊이가 다르다는 생각을 자주 해왔다. 어쩌면 그 차이는 마음속에 확보된 여유 공간 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환경과 능력 덕분에 언제든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관계에 조급하지 않고, 고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반면 여유가 부족한 사람은 타인의 인정이나 관계에 집착하며 그 공백을 메우려 한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경우도 많다.


책은 인간이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선택하는 여러 방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종교, 학교, 회사와 같은 사회적 구조는 소속이라는 안정을 제공해 불안을 완화해 준다. 알코올이나 마약 역시 짧은 시간 황홀경에 빠지게 하여 외부 세계와 단절된 감각을 만들고, 분리감을 잠시 잊게 한다. 그 순간만큼은 고독이 사라지고 불안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일시적인 해방 뒤에는 후회와 공허가 남고, 더 강한 자극을 다시 찾게 되며 반복과 집착이 뒤따른다고 한다. 내가 사람과 알코올이 공존하는 술자리를 유난히 편안하게 느껴왔던 이유도, 어쩌면 떳떳하지 못한 개인 능력과 그로 인한 안정감이 부족했던 상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와 분위기에 몸을 맡김으로써 잠시 불안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소수의 비범한 영웅이나 순교자만이 복종을 거절할 수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물질적·정신적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왜 관계에 덜 매달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능력과 자신감에서 비롯된 여유는 소속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한 발 떨어질 수 있는 힘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낭만을 쫓던 내가 현실과 타협하며 이직을 선택한 이유의 본질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능력에서 비롯된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만, 관계와 사랑에 과도하게 기대지 않을 수 있다는 감각. 이로 인해 내 사람들에게 지나친 관심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는 정서를 갈망했던 게 아닐까. 내가 편안함을 느꼈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개인의 능력으로 재정적·심리적 안정 상태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여유가 있었기에 타인에게 풍요롭게 베풀고 망설임이 없었다.


이직 후 큰 변화가 없어 불안과 무기력이 찾아오던 내게, 또 하나의 성숙한 인식이 활력을 찾아주었다. 나의 불안은 결핍의 증상이 아니라 ‘사랑하려는 인간의 정상적인 신호’였고, 그 해결책은 관계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만드는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불안까지 안아달라”라고 매달리기보다, 상대를 사랑을 존중하기 위해 내 불안을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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