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들은 결혼이 필요 없다

by 서글

30대에 접어들며, 해가 거듭될수록 ‘결혼’이라는 단어는 점점 무겁고 멀게 느껴져 왔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사회가 요구하는 재정적으로 안정된 ‘준비된 남자’의 기준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은 여전히 인생의 목표였기에, “언젠가는 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 살아왔다.


여전히 “지금이야”라는 확신이 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직과 동시에 연애를 시작하며, 한동안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결혼이라는 단어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조급해지지 않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개인의 여유라기보다는 사회 분위기가 주는 안도감에 가깝다. 30대 중반인 나의 주변을 둘러보아도 기혼과 미혼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고, “나 하나 챙기기도 버겁다”는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저출산을 우려하는 사회와 국가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이를 해결하고자 2006년부터 저출산 예산을 본격적으로 지출하기 시작했고, 출생아 수가 24만 9천 명이었던 2022년에는 51조 7천억 원, 아이 한 명당 약 2억 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율은 오히려 하락했다. 이쯤 되면 단순히 “지원이 부족하다”는 설명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왜 결혼 적령기는 계속 미뤄지는 것일까? 통계에 따르면 1인 가구는 이미 가장 보편적인 가구 형태가 되었고, 특히 30대 비중이 가장 높다고 한다. 자취한 지 오래된 나는 퇴근 후 운동을 다녀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조용한 집에서 맥주 한 캔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곁들인 뒤 잠드는 과정을 상상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혼밥, 혼술, 개인 방송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어쩌면 1인 가구는 혼자 사는 삶이 너무 잘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저출산의 원인과 해법(김민식, 2024)>은 이 질문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저출산은 특정 국가나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현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이전 인류 역사에서 저출산이 확인된 사례는 로마제국이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까지 로마인들은 평균 10명 이상의 자녀를 두었지만, 태평성대를 이룬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결혼 자체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로마제국의 출산율이 하락한 이유로는 다섯 가지가 꼽힌다. 물리적 안전의 확보, 경제적 안정의 개선, 혼인을 통해 얻는 이익의 감소, 육아 외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삶의 등장, 그리고 독신 여성의 불편함 감소. 이 흐름은 놀랍게도 현대 한국 사회와 닮아 있다.


한국 역시 전쟁 이후 치안이 빠르게 회복되며 사회는 점점 안전해졌고, 경제적 풍요를 이뤘다. 법과 제도가 정비되며 상속세와 증여세는 강화되었고,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질적 이익은 줄어들었다. 육아는 여전히 고된 노동인 반면,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콘텐츠는 넘쳐난다. 방범용 CCTV, 여성 전용 시설 확대 등으로 물리적 위험이 감소하면서, 여성에게 결혼은 ‘안전을 위한 필수 선택지’가 아닌 ‘인생의 방향 중 하나’가 되었다.


이처럼 저출산은 가난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안전하고 풍요로운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가깝다. 실제로 강남과 같은 고소득 지역의 출산율과 혼인율은 낮은 반면, 구로·노원·강서구처럼 상대적으로 평범한 주거 지역의 출산율은 더 높게 나타난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지원이 저출산을 해결할 본질적인 해법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저자는 저출산을 겪은 많은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강한 평등 분배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쿠바, 이란, 북한, 소련 등 대부분이 사회주의적 복지 체제를 채택했던 나라들이다. 문제는 평등 그 자체가 아니라, 책임의 차이가 보상되지 않는 구조다. 한국의 육아 지원 역시 아이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모두에게 동일하게 제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맞벌이가 당연해진 사회에서 육아는 부모에게 또 하나의 야근이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육아 노동을 이어가지만, 부모가 체감하는 혜택은 거의 없다. 지원은 아이에게 귀속되고, 부모의 삶은 더 바빠질 뿐이다. 여기에 상속세·증여세까지 더해지며, 부모가 자녀에게 실질적인 자산을 이전할 수 있는 통로마저 제한된다. 결국 출산은 ‘의미 있는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부담만 남기는 비합리적인 결정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첫째, ‘아이 중심 복지’에서 ‘부모 중심 인센티브’로 전환해야 한다.
육아를 사회에 대한 기여로 인정한다면, 그 보상은 부모 개인에게 직접 돌아가야 한다. 출산과 양육 기간 동안 부모의 근로 시간을 사회 기여 시간으로 인정하고, 연금 가산점이나 세제 혜택으로 환산할 수 있도록 한다. 아이만이 아니라 부모의 삶이 실질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둘째, 균등한 지원이 아니라 책임에 따른 차등 보상이 필요하다.
첫째와 둘째, 셋째 이상을 낳은 가정의 삶은 분명히 다르다. 그 차이가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 출산 순위가 높아질수록 부모에게 돌아가는 세금 감면, 자산 이전의 자유, 주거 혜택이 구조적으로 커진다면 출산은 더 이상 손해 보는 선택이 아니다.


셋째, ‘부모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명확히 설계해야 한다.
성인 자녀를 둔 부모 전용 주거 상품, 대출 혜택, 문화·교육 인프라 접근권은 특혜가 아니라 미래 세대를 길러낸 대가다. 지금의 정책은 출산을 도덕적 선택으로 요구하지만, 앞으로는 합리적 선택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저출산은 개인의 가치관 문제가 아니라, 사회 설계의 문제다. 아이를 낳는 선택이 구조적으로 불리한 사회에서, 아무리 많은 예산을 투입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이제는 “왜 낳지 않느냐”라고 묻기보다, “왜 낳기 어렵게 만들었는지”를 돌아봐야 할 때다.


출산을 장려하는 사회가 아니라, 부모가 되는 선택이 합리적인 사회. 그 방향으로 정책의 초점이 이동할 때, 저출산이라는 문제 역시 비로소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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