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사실 이 직업을 선택할 때 거창한 사명감이 있었던 건 아니다.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자’는 낭만적인 생각보다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더 컸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니 이 직업도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일을 하다 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안정적인 관계가 아닌 이상 사람을 만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버거울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일에 완전히 무감각한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 지하철 계단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힘들어하는 어르신을 본다거나, 딱한 사연을 듣게 될 때면 마음이 쉽게 흔들린다. 어쩌면 나에게도 작은 정의감 같은 것이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래전부터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 생각들 중 일부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은 마음, 일종의 ‘척’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최근 이런 허영심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게 도와준 영화 한 편을 보게 됐다.
<에린 브로코비치 (스티븐 소더버그, 2000)>의 주인공 에린 브로코비치는 아이 셋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전문적인 학력도, 안정적인 직장도 없다. 취업 면접에서도 번번이 떨어지고 낙심한 채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에 휘말리게 된다. 쉽게 흥분하는 그녀의 성격 탓에 상대방 과실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송에서 패소하며 빚만 늘어난 상황에 놓인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변호했던 변호사 에드 매즈리의 법률사무소를 찾아가 자신을 고용하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고 버틴다.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맡은 일을 누구보다 집요하게 파고든다. 에드가 건네준 부동산 사건 관련 서류를 정리를 하던 중 PG&E라는 기업과 관련된 사건을 발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료 기록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는다. 정확한 경위를 알고 싶은 그녀는 캘리포니아주 힝클리에 위치한 PG&E 근처에 거주하는 도나 젠슨의 집에 직접 찾아간다.
도나는 내놓지도 않은 집을 사겠다며 PG&E 측이 먼저 찾아왔고, 아픈 그녀와 남편의 병원비를 전액 지원해주고 있다는 정보를 건네준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그녀는 수질 관리국까지 찾아가 자료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작은 의문에서 시작된 사건은 알고 보니 PG&E 측이 안전한 크롬을 사용했다고 지역 주민들에게 홍보한 것과는 달리 발암 물질인 6가 크롬을 사용해 힝클리의 지하수를 오염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600명이 넘는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환경오염 사건을 덮으려는 기업의 파렴치한 시도였던 것.
위험을 감지한 PG&E 측은 에드와 에린을 만나 젠슨 부부에게 25만 달러를 건네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무책임한 태도와 턱없는 금액에 이를 거절하고 소송을 위해 본격적으로 주민들을 소집하기 시작한다. 에린은 주민 한 명 한 명 직접 찾아가 그녀의 진실된 마음과 특유의 붙임성을 통해 유대를 쌓아간다. 그렇게 634명의 주민들의 서명을 전부 받아내고 오염을 입증하는 내사 서류까지 확보하여 PG&E와의 분쟁에서 결국 승소하게 된다. 판사는 PG&E에게 고소인 전체에게 총 3억 3천3백만 달러라는 금액을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린다. 처음 찾아갔던 도나는 500만 달러를 배상받게 되고, 에드는 일등 공신인 에린에게 성과급 200만 달러를 건네준다.
영화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건 에린이 처음부터 거창한 정의감을 가지고 사건에 뛰어든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그저 궁금한 걸 그냥 넘기지 않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어 했고 자신이 맡은 일을 끝까지 파고들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게 된다.
신념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거창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일을 성실하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인테리어 일도 비슷한 맥락일지 모르겠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서 생활하고, 쉬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삶의 중요한 장소다. 그렇기에 내가 하는 일 역시 누군가의 일상에 작게나마 영향을 남기게 될 것이다. 에린처럼 그저 하루하루 맡은 일을 성실하고 진실되게 이행해 나아가다 보면 긍정적인 결과들이 따라오지 않을까 싶다.
현장에서 배우고, 고객을 만나고, 실수도 하면서 경험을 쌓아가며 나라는 사람이 가진 태도와 시간들로 인해 천천히 형태를 갖춰가는 것. 지금은 그저 그 과정을 차분히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