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언제 완성되는가

일상 속 불편함이 가르쳐준 '완전한 이해'

by 번역가 권서경

나는 원체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가족이나 친구 등 친분이 있는 사람은 물론 예외지만, 처음 보거나 손에 꼽는 횟수밖에 만난 적이 없는 사람, 혹은 업무상의 관계 등을 이유로 어쩌다 한 번 만나는 사람이면 외형이 특출나게 인상적이지 않은 한 얼굴을 잘 외우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학창 시절 학년 첫 학기는 해마다 찾아오는 시련이었다. 안 그래도 낯가림이 심한 탓에 새 학기에 친구를 사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겨우 대화를 텄다 해도 난관이 남아있었다. 가령 1교시 쉬는 시간쯤 같은 반 아이와 점심시간에 문구점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는데, 정작 점심때가 되면 그 애가 누구였는지 헷갈려 엉뚱한 사람에게 말을 건다든지, 지난 시간에 펜을 빌려 간 애가 얘였는지 쟤였는지 확신하지 못해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비슷한 상황이 매년 반복됐다.

새해를 앞두고 문득 그때가 떠올라 찾아보니, 이런 걸 프로소포그노시아(안면실인증)라는 선·후천적 신경학적 장애의 증상으로 본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안면인식장애'다. 심한 경우에는 가족 또는 본인의 얼굴을 못 알아보거나 상대방의 표정 변화조차 읽지 못하는 정도라고 하니, 나 정도면 아주 경미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검색 결과에서는 목소리나 걸음걸이로 사람을 구분하는 등의 대처법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내 청각과 후각이 기민한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유를 알고 나니 이해는 쉬워졌지만, 번듯한 의학 명칭까지 존재하는 '장애'라는 사실이 어쩐지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일생을 비장애인으로 살아왔건만, 나의 안면 인식 문제가 의학적으로 인정된 '장애'였다니.

문득, 얼마 전 의뢰받은 외서 검토서 작성을 위해 소설을 한 권 읽었던 일이 떠올랐다. 장애인(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정과 연민의 시선, 그리고 그들이 절대선(善)일 거라는 사람들의 일방적 기대에 관해 물음을 던지는 책이었다.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던 중, 소설의 본 주제와는 조금 다른 결이지만 '장애는 결함이 아닌 불편함'이라는 장애 관련 사회 인식 개선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했었다.

그 문장이 중첩하듯 떠올랐다. 장애는 결함이 아닌 '불편함'이다. 무의식적인 차별을 범하지 않기 위해 평소 의식적으로 되뇌던 그 문장이 내 모습을 돌아보고 나서야 완전한 이해로 이어졌다. 이런 걸 말하는 거였구나, 라고.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를 보다 보면 나와 같은 불편함을 겪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비단 똑같은 불편함은 아니더라도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의학적으로 명명되지 않았을 뿐, 누구든 일상에서 크고 작은 불편함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처럼 장애는 괜히 무겁게 과장되게 생각할 일도,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유쾌한 '척' 행동할 일도 아닌, 개체의 특성 중 하나일 뿐이다.

결국 사람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역지사지의 사고가 아니라, 직접 그 입장에 서봐야만 알 수 있는 존재인 걸까. 그런 생각이 들어 인간의 우둔함에 조금 울적해졌다.

여기까지 써 놓고 다시 읽으니 당연한 말을 대단한 발견인 양 늘어놓은 것 같아 부끄러움이 앞선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의미 있는 깨우침이었기에 혹시 모를 망각을 대비해 기록해 두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으나, 나의 이 특성은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적잖은 불편을 초래한다. 가령 영화를 볼 때라든지. 특히 서양인 얼굴은 웬만큼 눈에 익은 유명인이 아니면 구별이 안 돼서 영화 초반에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이던가 헷갈려하느라 스토리를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다.

다만 다행인 점은 내 직업이 프리랜서라는 사실이다. 이 일을 하면서 새로운 얼굴을 익혀야 할 일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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