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니또를 소개합니다 1

나만 몰랐던 내막들. 날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

by 서행하




2016년, A 박사님과 R.


실험실 소속은 같았지만 방을 따로 쓰고 있었던 A 박사님과 직속 연구생이었던 R.

이 둘은 L의 본래 성격을 이미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뒤에서 나를 걱정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다.


특히 동갑내기 친구였던 R은 나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준 친구였다.

학창 시절 선후배 간 군기에 대해 자신의 경험담을 토로하며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당했을 때 싫은 말과 행동은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내가 당했으니까 후배들도 당해야 된다?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






2017년, S 언니.


P와 같이 일하던 시절 동료였던 S 언니.

늘 똑소리 나게 일 잘하고 성격도 좋아서 모두와 잘 지냈던, 내가 많이 따르고 좋아했던 언니.

매일같이 P에게 시달리며 힘들어하던 나를 위해

매장 내 상급 임원이었던 셰프님에게 P의 행동을 보고하셨다.

그리고 평소 나를 좋게 보셨던 셰프님은 그 길로 P를 다른 매장으로 이동시키셨다.

그걸 퇴사하고 한-참 지나서, 불과 3년 전에야 알게 되었다.

제 때 고맙단 말도 못 하고.. 진작에 얘기 좀 해주지 그랬냐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그래도 너무 감사했다.

지금도 매일같이 고맙다고.. 말하면 믿어주려나.


그제야 그때 P의 쌍 퍽유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2020년, J 점장님.


회사 내 타 지점의 점장님이었던 J. 내가 입사하기 전 H와 함께 일하셨다.

이 분은 내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고, 그런 나를 자신의 지점으로 데려가려고 하셨단다.

왜 남 이야기하듯 하냐면, 이 이야기를 퇴사 이후에 건너 건너서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걸 H가 못하도록 막았고, 그 과정에서 J와 H의 사이가 조금 틀어지기까지 했다고.


내가 퇴사한 그 즈음.. 그분도 퇴사하셨다.


이 분은, 솔직히 상상도 못 했다.

나와 친하지도 않았고, 얼굴도 회사 내에 특별한 '용건'이 생겨야만 겨우 볼 수 있었던 데다가

어쩌다 한 번 얼굴을 봐도 겨우 인사 정도만 주고받던 '데면데면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나를 도와주려고 해 주셨다니.. 놀라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이 분께는 제대로 된 감사 인사도 못했다. 이 공간을 빌어 진심으로 그때 마음 써주셔서 감사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2020년 겨울, 어떤 손님.


가장 바쁜 점심시간 피크타임을 쳐내고 난 후였다.

겨우 한숨 돌리고 재고품 정리를 위해 바에서 홀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분주하게 박스를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손님이 내게 다가왔다.

피크타임에 내가 주문을 받았던 남자손님이었다.

그 손님은 난데없이 나에게 책 한 권을 주고 가셨다.

도대체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왜 나에게 책을 주고 간 건지.. 아까 내가 주문받을 때 뭘 잘못한 건지..

그 짧은 순간 동안 머릿속이 온갖 의문으로 혼란스러웠지만, 주셨으니 받기는 했다.

손님이 가고 나서 가만히 책 표지를 들춰보니 친필 사인과 함께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한 계절...


책은 「언어의 온도」였고, 이 책을 주신 분은 이기주 작가님이었다.

그 당시엔 그분이 작가님 본인인 줄도 몰랐다.

책을 받고 어리둥절 서있던 내게 H가 다가와 '저 작가를 아느냐'고 물어서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이 책은 지금도 내 책장에 꽂혀있다.

솔직히 아직도 '왜'가 궁금하긴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아마 작가님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다.

혹시 그때 응대했던 내 언어의 온도가 너무 차가워서 깨달으라는 의미로 주신 것이었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쁜데 너무 친절하게 군다며 포지션이 교체되거나 뒤에서 혼이 나야 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궁색하게 변명한다.

그래도 아리송한 와중에 그 기억이 '좋게' 남아있는 것은, 그 뜻을 나에 대한 무언의 응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2019년 - 2020년, 날 예쁘게 기억해 주신 모든 손님들.


'손님에게 친절하라'는 그 당연한 태도조차 통제당해야 했던 시기.

좋은 손님들께 마음껏 친절하는 것조차 눈치 보며 머뭇거려야 했던 나를

그 와중에도 알아주신 손님들이 있다.

내가 퇴사하는 것을 나보다 더 아쉬워해 주신 손님들.

이 글을 통해 그분들을 새삼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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