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을 버리기까지

by seoha

주말을 맞아 신나게 쇼핑을 하고 돌아오는 길, 집에 있는 안입는 옷들을 미련없이 정리해야겠단 비장한 다짐으로 귀가를 했다. 가방만 풀고 바로 옷방으로 향해 서랍에 있는 옷들을 죄다 꺼내놓고, 곤도 마리에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는 말을 되새기며 하나씩 정리했다. 신혼집으로 이사온지 어연 1년, 이사하며 나름 많이 버렸고, 또 중간중간 대청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버릴 옷들은 많았다. 이제는 나이에 맞게, 또 나의 체형에 맞게 입는 방법에 대해서 조금은 터득한지라, 언젠가 입겠지 싶었던 옷들은 기약 없는 약속이 됨을 알고 있었다. 옷을 버리고 개고, 걸어놓는 과정에서 내 취향이 어떤 특정 쇼핑몰, 특정 스타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했다.


분기별로 하는 옷정리지만 이번 옷정리가 나에게 유의미했던 건, 드디어 방송을 할 때의 옷들을 모두 버렸다는 것이다. 항상 사람들에게 '난 미련없이 나왔다'고 하지만 사실 그 일을 참 좋아하기도 했고, 그만큼 잘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나름 신경쓴다고 구매했던 마감이 엉성한 싸구려 원피스와 정장들은 옷장에 한가득했다. 방송국을 나오기 전, 몇 개는 기부를 했지만 정작 내가 아끼는 옷들은 집에 고스란히 보관했고 그 중 더 좋아하는 아이들은 제주를 떠나온 이후 수많은 이사 과정에서 내 옷 짐들 사이에 끼인 채 여기 저기 데리고 다녔다. '언젠가는 또 입을 날이 오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옷 정리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몇 벌의 원피스와 셋업은 이미 유행을 다소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 꽤 잘 어울리는 옷들이었고, 작년까지도 종종 입었다. 입을 때마다 방송을 했던 내 모습을 항상 떠올리곤 했었다. 절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고 다니지만 사실 그 때의 나는 너무도 찬란했고 예뻤던 건 부정할 수 없기에. 가끔 현실이 시궁창이라고 느껴질 때면 과거를 곱씹어보곤 했다. (물론 그 당시에도 나름의 힘듦이 있었겠지만,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기에...)


생각보다 이번의 나는 매우 확고했다. 한 2~3초 고민 후 바로 정리를 했는데, 이 2~3초의 고민조차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를 할지, 헌옷수거함에 넣을지의 고민이었다. 처분할 옷 꾸러미에 쌓아두고 헌옷수거함으로 넣는 순간, 방청소 이상의 개운함, 그리고 왠지모를 서글픔이 느껴졌다. 가끔씩 느껴지는, 화려한 과거에 대한 미련들을 모조리 정리한 기분이었다. 흡사 오래 사랑했던 전 연인을 이제서야 정리하는 느낌이랄까.


가끔은 그 때의 내가 생각이 나겠지만, 그래도 예전만큼 아련함이 들진 않을 것 같다. 인생은 길고, 또 다른 선택 속에서 또 그만큼의 영광을 찾을 날들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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