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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ha Jul 01. 2023

그저 성실하게

효율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그래도 성실함은 자부할 수 있어요.

 학창 시절에 그런 애들이 있다.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은 꽤 긴데 생각보다 성적이 나오지 않는 애들. 그게 딱 나였다. 공부하는 만큼 비례해서 나오는 내신 점수와 달리 모의고사는 어느 정도 머리가 있어야 하는 건지, 내신은 늘 반에서 1등이었지만 모의고사는 늘 죽을 쒔다. 스스로도 머리가 특출 나지 않다고 여겨서 그런지 공부할 때는 그냥 교과서를 다 외워버리는 편이었다. 누군가는 비아냥거리며 '쟤는 왜 하는 만큼 점수가 안 나와?'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말들에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성실하게 학업에 임하는 것 밖에 답은 없었다. 물론 원하던 대학에 가진 못했지만.


 스물한 살 대입에 실패하면서 방황할 법도 한데, 그럼에도 나는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다. 학교는 싫었지만 한 시간 반 걸리는 통학길을 감수하면서 늘 제일 먼저 강의실에 들어갔다. 수업을 마치고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다시 한 시간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서 밤새 공부를 하면서 새벽공기를 마시며 집에 돌아갔다. 누군가는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저렇게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그저 어릴 때부터 남아있던 공부하던 습관이 대학생 때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당시엔 열심히 공부하고 매 순간 성실하게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애초에 성인이 돼서 놀고 싶다란 생각을 크게 하지도 않았고, 사실은 오히려 그렇게 뭔가 열심히 나의 길을 닦아가고 있다는 그 느낌이 좋았다. 딱히 꿈은 없지만 어떤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뿌듯함. 대학교 1학년 때 기말고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싱그러운 초여름 냄새는 그런 성실함의 대가로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의 '의식이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서른이 지난 지금까지도 늘 가까이 두고 있다. 책을 통해 지식의 통로를 계속 열어두고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관리하는 사람. 사실 공부며 운동이며 열심히는 하지만 티가 나지 않는 편이다. '저 헬스 하는데요'라고 말하면 다들 위아래를 훑으며 '전혀 헬스 하는 몸이 아니신데요...'라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중국어 학원을 다니면서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는 아무리 잠을 줄이면서 해봐도 다른 사람들의 절반 정도밖에 하지 못한다. 그래도 이젠 타인의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나는 그래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고 결과는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약간의 근육통이 생겼을 때 '오, 어제 운동이 잘 되었나 보다!'라고 혼자 흐뭇해하기도 하고, 어려운 중국 기사 속에서 모르는 단어에만 밑줄 쳤던 형광색칠의 개수가 점점 줄어드는 걸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 책을 읽다가 알고 있던 내용이 나와서 괜히 반가웠던 것. 그런 식으로 소소하게, 다른 사람이 몰라도 나는 그렇게 조금씩 더디게 성장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퇴사를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성실하게, 열심히 살고 있다. 매일 새벽에 필라테스와 헬스를 하고, 도서관에 콕 박혀 읽고 싶은 책을 쌓아놓으면서 한 권 한 권 정리한다. 그렇게 쌓여가는 지식만큼 크게 성장하진 못하더라도, 나의 의식은 성실함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덕분에 요행을 바라는 건 나에게 사치가 되었고 매일 일기장에 적을 거리는 넘쳐난다. 그렇게 묵묵하게라도 나아가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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