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생소한 알렉시티미아..
이름도 생소한 알렉시티미아.. 우리 말로는 감정 표현 불능증이다. 책 <아몬드>를 읽기 전까지는 이런 병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책 서두 일러두기에 의하면, 알렉시티미아는 1970년대에 처음 보고된 정서적 장애로, 아동기에 정서 발달 단계를 잘 거치지 못하거나 트라우마를 겪은 경우, 혹은 선천적으로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경우 발생한다고 한다. 편도체의 크기가 작을 경우 감정 중에서도 특히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한다.
주인공 윤재는 그렇게 선천적으로 편도체가 작게 태어났다. 웃지 않는 아이..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윤재의 할머니는 그런 윤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동시에 사랑을 담아 예쁜 괴물이라 부른다. 반면에 엄마는 어떻게든 윤재가 평범하게 보이기 위해 감정 훈련을 시키며 애를 쓴다. 아이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원했다. 걱정이 많고 눈물 바람으로 감정에 치우치는 엄마보다는 늘 긍정적이고 씩씩한 욕쟁이 할멈이 윤재는 자신과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할멈은 윤재가 부르는 방식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윤재에게 절대적인 사랑으로 지극정성이다.
윤재가 6살 때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난다. 윤재의 눈앞에서 11~12살쯤 돼보이는 초등학생 아이가 중학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다. 아이는 피투성이가 되어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짧고 얕은 숨을 빠르게 달싹거리고 있다. 그런 현장을 목격하고도 6살 난 어린 윤재의 눈엔 두려움기가 없다. 그저 사건을 인식할 뿐이다. 꽤 위험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가까운 구멍가게에 들어가 진지하게 상황을 전하지만 어른은 무덤덤한 아이의 태도에 그저 장난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인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수 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경찰에 신고를 한다. 그사이 주검이 된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 줄도 모르고..
윤재의 생일은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다. 16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윤재는 할멈과 엄마를 따라 외식을 나왔다. 처음으로 하늘에선 생일에 흰 눈을 선물해 주었지만, 그 선물로 인해 하늘은 할멈을 데려갔고 엄마는 껍데기만 남긴 채 숨만 남겨주었다. 식사가 끝나고 윤재가 계산대에서 자두맛 캔디를 양손 가득 얻어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출입문을 나오려는 순간 사건은 벌어졌다. 먼저 나가 펄펄 내리는 눈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으며 깡충대고 있는 엄마에게, 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와 망치로 머리를 세 차례 내리찍었다. 그러곤 문을 밀고 나가려는 윤재를 밖에서 제지시키며 온 힘을 다해 막아선 할멈을 향해 칼을 휘둘렀고, 그 자리에서 할멈은 윤재가 서있는 유리문에 붉은 피를 뿌리며 하늘로 갔다. 세상을 증오한 그 남자의 타깃은 웃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날 사고로 남자 자신을 포함해 6명이 죽고 한 명이 다쳤다. 눈앞에서 엄마와 할멈이 그렇게 끔찍한 사고를 당했지만, 윤재는 6살 때의 그 날처럼 무표정으로 그저 바라보고만 섰었다. 윤재의 가슴 안에는 슬픔이나 외로움, 막막함 같은 감정 대신 의문만 들었다.
'엄마와 할멈은 뭐가 그리 우스워 깔깔댔던 걸까.
남자는 물건을 부수지 않고 왜 사람을 죽인 걸까.
왜 아무도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을까.. 왜...'
곤이는 윤재와 얼굴이 닮은 또래의 아이이다. 어릴 때 미아가 되어 불법체류자인 중국인 노부부의 아이로 크다가 아동시설과 입양, 파양, 다시 시설로 반복하는 과정에서 반사회성을 지닌 채 소년원도 들락거리게 된다. 곤이라는 이름도 소년원에서 자신의 여러 나약한 느낌의 이름들이 싫어서 스스로 지은 이름이었다.
곤이의 친아빠인 윤권호는 대학교수이고 그의 아내도 커리어가 훌륭했으나 아들을 잃은 상심으로 병이 들어 곧 죽게 되었다. 윤 교수는 아내가 죽기 전에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보여주고 싶은데, 어렵게 찾은 곤이는 아내가 꿈꾸었던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서 곤이와 닮은 윤재를 찾아내었고 윤재에게 아내를 만나 아들인 것처럼 행동해 달라고 부탁한다.
남자의 입장이 간절해 보였고, '딱히 해가 되지 않는다면 도와주는 편이 좋다'는 할멈의 조언이 떠올라 윤재는 남자의 부탁을 들어준다. 물론 곤이의 존재를 먼저 알았다면 윤재의 선택은 달라었겠지만..
그 후로 윤재의 삶은 점점 더 골치 아파지는 듯했다. 적어도 나와 책 속의 남들 눈에는 그랬다.
자신을 대신해 아들 노릇을 한 윤재를 곤이는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으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윤재의 태도는 곤이의 광기를 더 자극했다. 그럴수록 속 마음이 약한 곤이 자신은 더 못 견디게 괴로웠다. 그런 곤이를 윤재는 알아봤다.
윤재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윤재가 자신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곤이는 윤재에게 호감을 보이며 다가간다. 또한 윤재는, 보드라운 손의 촉감만을 기억하며 그리워해 오던 엄마를 만나본 유일한 친구였다. 곤이의 거친 행동 속에 숨겨있는 약한 마음을 볼 수 있었던 윤재는 그렇게 다가오는 곤이와 친구가 된다. 윤재는 곤이를 '자신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단순하고 투명했다'라고 표현한다.
곤이는 친아빠인 윤 교수와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했다. 곤이가 표현하는 아빠의 모습은 이러했다.
"그 사람은 내 인생에 시멘트를 쫙 드리 붓고 그 위에 자기가 설계한 새 건물을 지을 생각만 해."
"난 아들이 아냐. 잘못 찾아온 잡동사니지. 그래서 그 여자 죽기 전에 얼굴도 못 본 거고..."
어떻게 그렇게 당하고도 곤이와 친해질 수 있냐는 윤 교수의 질문에 윤재는 단순한 대답을 내놓는다.
"곤이는 착한 애니까요."
근거는 설명할 방법을 못 찾고, 그냥 안다고. 곤이가 좋은 애란 걸...
곤이가 윤재의 마음에 고통, 죄책감, 아픔 따위를 알려주려 했다면, 도라는 꽃과 향기, 바람과 꿈을 느끼게 해 준 여자아이였다. 사랑이란, 예쁨의 발견이라고 정의를 내렸던 할멈의 말뜻을 몰랐었는데, 예쁨을 발견한다는 것에 윤재는 오묘하게도 도라의 얼굴이 떠오른다.
도라의 등장은 곤이에게는 친구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과 흡사했다.
때마침 사건 하나가 또 생긴다. 수학여행지에서 간식비로 모아둔 회비가 도난당했는데, 그 돈이 곤이 가방에서 발견된 것이다. 곤이는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했고 명백한 알리바이와 증인이 있는데도 다들 곤이가 한 거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 그들에게 곤이의 짓이 분명해진 건, 윤 교수가 학교로 찾아와 그 돈을 갚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곤이는 최선을 다해 망가진 행동을 보였고, 그런 곤이에게 도라는 일침을 쏜다.
"쓰레기.. 꺼져. 여기서 굴러다니지 말고 너한테 어울리는 데로 꺼지라고!"
도라가 윤재의 관심이 쏠려있는 아이만 아녔어도 그만한 말에 눈도 깜짝할 곤이가 아니었지만, 그 말을 한 아이가 도라였기 때문에 순간 당황한 채 휙 사라져 버린다.
곤이는 윤재에게 찾아가 너도 내가 한 짓이라 생각하냐고 묻는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상하진 않아. 넌 그렇게 생각할 만한 요소가 많으니까. 너 말곤 그럴 만한 사람이 잘 안 떠오를 거야."
"근데 나 안 그랬다.. 나 말이야, 그냥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대로 살아 보려고 해.. 그래서 강해질 거야.. 상처받는 걸 멈출 수 없다면 차라리 상처를 줄 거야.."
곤이는 그렇게 윤재 곁을 떠나고 빠른 속도로 비극은 진행된다. 곤이가 강해지는 방법은 자기보다 몇십 배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소년원 선배 철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윤재는 곤이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했다.
'네 엄마 앞에서 아들인 척해서.
내게 다른 친구가 생긴 걸 말하지 않아서.
너를 믿는다고 말해 주지 못해서..'
곤이를 찾아낸 윤재는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 냉혈한 철사는 손에 칼을 쥐어주며 곤이에게 윤재를 손보도록 했고, 곤이는 칼까진 쓰지 못했지만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발길질을 했다. 강한 충격에 넘어지면서 박힌 못에 찔렸는지 윤재의 다리에선 피가 흘렀고, 그걸 본 곤이가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무너졌다. 곤이가 어떤 아인지는 곤이 자신보다도 윤재가 더 정확히 알았다.
"말했잖아. 넌 그럴 수 없는 애라고.. 그게 너야 "
"좋겠다... 아무것도 못 느껴서.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철사가 이번엔 윤재를 시험한다.
"대단한 우정 같은데.. 넌 곤이를 위해서 뭘 할 수 있니?
"뭐든지 다요"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한 번 견뎌 봐 이런 놈 때문에 네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보고 싶다"
철사의 칼은 곤이를 겨냥했으나 그걸 막아선 윤재가 대신해서 가슴 깊이 찔렸고 피를 쏟아내며 정신을 잃었다. 곤이는 철사를 향해 악마라 소리치며 그 분노는 절대적 강자, 철사의 가슴에 쉽게 칼을 꽂게 했다.
곤이가 울부짖으며 윤재를 흔들어 깨웠다. 윤재는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곤이를 향해 간신히 속삭인다.
"네가 상처 입힌 사람들에게 사과해. 진심으로. 네가 날개를 찢은 나비에게도."
"그럴게. 그럴게. 그럴게. 그러니까 제발 좀..."
톡. 윤재의 얼굴 위에 곤이의 눈물 방울이 떨어진다. 순간 느낀다. 뭔가 울컥. 비로소 윤재가 괴물에서 인간이 되는 순간이다.
철사의 생명엔 지장이 없었지만 갖가지 저지른 엄청난 일들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곤이는 정당방위로 인정될 것이었고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윤 교수는 휴직계를 내고 오직 곤이만을 위해 살아보겠다고 했다. 곤이가 윤재에게 전한 쪽지에는 꾹꾹 눌러쓴 뭉툭한 글자가 몇 개 적혀 있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진심.'
윤재가 누워 있는 동안 거짓말처럼 엄마가 깨어나 휠체어에 태워져 웃으며 들어온다. 윤재가 '엄마'라 부르는 순간 엄마는 왈칵 눈물을 쏟는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무언가를 엄마가 해냈다. 그런데 엄마는 윤재에게 같은 말을 다르게 한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무언가를 네가 해냈다고. 갑자기 윤재의 뺨이 뜨겁다. 눈물이다. 윤재가 운다. 그런데 또 웃는다. 윤재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1부에서 4부를 거치면서 윤재의 편도체가 커갈수록 표지의 농도가 밝아지고 있다. 괴물에서 인간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사랑의 힘이 작용한다.
작가 손원평은 후기에서 사랑의 힘을 강조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괴물로 만드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고. 아울러 이 소설을 통해 상처 입은 사람들, 특히 아직도 가능성이 닫혀 있지 않은 아이들에게 내미는 손길이 많아 지기를 희망했다.
<아몬드>를 읽으면서 순간순간 충격과 감동으로 울컥하곤 했다. 참 많은 걸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두려웠다. 행여 내가 누군가의 가능성을 닫아 버리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도 윤 교수처럼 아이를 먼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냥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대로 살아 보려고.. 상처 받는걸 멈출 수 없다면 차라리 상처를 줄거야!'
곤이를 끝내 검은 세계로 밀어 버린 무서운 편견.. 많이 안타깝고 반성해 본다.
벼랑 끝에서 잡아줄 손끝을 애절하게 기다리는 누군가의 절규를, 따뜻한 마음이라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주저 없이 손 내밀어 잡아줄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싶다.
* 부분부분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여 줄거리를 요약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