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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서희 Aug 05. 2017

사과 궤짝으로 지은 구멍가게

부모님 회고담 중에서..


이 이야기는 나의 부모님의 이야기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배경을 먼저 소개한다.


 대동군이 고향 나의 아버지께서는 6.25 때 인민군으로 강제 징병되어 가족의 품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22살이셨던 아버지는 유난히 왜소하고 쇠약하셔서 신체검사에서도 기준 미달이었으나 전시에 인민군 수 채우기로 희생양이 되어 총 한 자루 거머쥐고 전쟁에 합류되셨다. 생사를 넘나드는 아버지의 숨 막히는 탈령 스토리는 기회가 된다면 소중한 기록으로 남길 수 있길 희망한다. 

오늘은 낯선 타향 땅에서 엄마를 만나 결혼을 하시고 빈손으로 한 가정을 일궈내신 이야기 중 감동 어린 회고담 하나 소개한다.


아버지가 수용된 거제도 포로수용소엔 약 13만의 인민군 포로가 있었는데, 그중 3만은 반공청년으로 분리되어 남한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남한 군에 강제 입대해 쇠약한 몸으로 또다시 2년 6개월의 힘겨운 군생활을 견뎌내어야 했다.

다행히도 우연히 남한에서 먼저 기반을 잡고 계시던 사촌동생과 매부를 만나 심적으로 많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가족을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로 외로웠던 타향살이를 버텨내는 데는 이 두 분이 큰 힘이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무일푼이셨던 나의 아버지가 남한 땅에서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서울 용산이었다. 관사 담벼락 아래 사과 궤짝이나 폐널빤지를 모아 손수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지으셨다. 아이들 눈깔사탕이나 구슬, 딱지, 문구 정도의 본전이 적게 드는 물건들을 조금씩 도매로 떼어와 파셨다. 물건들을 놓을 좌판을 비스듬히 짜고 그 좌판 아래서 겨우 쪽잠을 자는 생활이 그 시작이었다. 


빛바랜 사진 속 젊은 날의 부모님..

28살이 되던 해, 수용소에서 알고 지내던 반공청년 중 한 분의 소개로 엄마를 만났다. 그분은 엄마를 길러주신 한국무용가 김백봉 님(현 경희대 명예교수)의 친척분이었다.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도 파란만장하시다)


결혼을 하려면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해야 했지만 아버지에겐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결국 관사 마당에 또다시 사과 궤짝과 폐널빤지로 겨우 다다미 한  깔만한 방 한 칸(일명 하꼬방)을 지어 그곳에서 두 분의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비록 집다운 골격도 갖추지 못하고 난방도 안되고 수돗물도 안 나오는 사과 궤짝 판잣집에서 시작된 생활이었지만, 두 분 모두 악착같이 한 푼 한 푼 아끼며 구멍가게를 꾸려 나가셨다. 아이들은 선하고 친절하신 아버지를 유난히 좋아하며 매일 찾아와 장사가 잘 되었다. 코 묻은 돈들이 모여 점점 큰 자본이 되어갔다.


사과궤짝으로 지은 당시 구멍가게의 실제 모습. 아버지 말씀대로 가게 앞엔 아이들의 놀이터 마냥 즐거운 모습의 아이들이 모여있다.


가게가 제법 잘 되니 담벼락을 내어주던 관사 주인이 권리세를 요구하게 되었다. 당시 돈으로 15만 원을 요구했는데 두 분에게는 엄두도 못 낼 큰돈이었다. 엄마는 친정(엄마를 길러주신 분들)에서 돈을 빌려온다며 나가 어렵게 돈을 마련해 오셨다. 대신 이자를 주어야 한다고 해서 아버지께서는 매달 쥐꼬리만 한 수입에서 꼬박꼬박 이자를 떼어 갚는 것이 큰 부담이셨다. 원금이 다 모이자 엄마께 돈을 내밀며 이자부담이 크니까  빨리 갚으라고 하셨다. 그때 엄마의 대답이 평생 아버지에게 잊히지 않는 큰 감동과 힘이 되었다고 하신다. 지금은 백발의 구순이 다 되어 그때의 회고담을 잔잔히 푸시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떤 건지 감히 다 헤아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치매로 아가가 되어 버린 엄마에게 늘 다정하게 대하시는 모습에서 그 마음을 조금 헤아려볼 수 있을 뿐이다.



"여보 이 돈 안 갖다 줘도 돼요.

 돈 우리 돈이었어요. 

그동안 이자도 다 저축해 놨어요.."



 부모님의 결혼사진 한 장. 아버지 옆에는 남한에서 먼저 기반을 잡으신 사촌 동생과 조카, 그 옆이 매부시다. 엄마 옆에 계시는 분은 엄마를 길러주신 한국무용가 김백봉님.




같은 성씨 안 가였던 엄마를 어릴 때부터 친딸처럼 키워 주신 안재승 선생(사진 뒷줄의 세 번째)은 김백봉 님의 부군이시며, 절설적인 한국 무용가 최승희 씨의 부군 안막 선생의 동생으로서 무용 연출가 이셨다. 돈을 빌리러 온 엄마께 큰돈을 그냥 주셨다고 엄마께서 예전에 말씀하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사진 뒷줄의 첫 번째 분이 엄마와 아버지의 연을 이어 주신 수용소 동료분이시다.

용산에서 사과 궤짝 판잣집으로 시작한 생활터전은 오늘날까지 어어져 지금은 재개발되어 고층 아파트 완공을 기다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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