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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서희 Aug 03. 2018

내 인생의 바이블

행복의 조건 - 법정스님


법정스님의 산문집들은 최근 내 인생의 바이블이 되었다. 이전에 소개했던 법정스님의 산문집 <텅 빈 충만>을 포함하여 <맑고 향기롭게>,<홀로있는 시간>, <산에는 꽃이 피네>등 요즘 유투브를 통해 자주 듣고 있는 산문집들이다. 이중 <산에는 꽃이 피네>는 스님의 투박한 육성으로 직접 낭독되어 있는데, 처음엔 익숙치않은 목소리와 말투가 다소 불편하더니 들을수록 구수한 숭늉을 대하는 것과 같이 오히려 편안하고 좋다. 요즘은 깊은 존경과 겸손의 자세로 대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목소리가 아니라 스님의 마음과 뜻이 담겨있는 말씀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삶', '행복의 조건', '자기 안을 들여다 보라'.. 등 모두가 진언들이다. 그중 오늘은 '행복의 조건'을 소개하려 한다. 이 글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그 어떤 군더더기를 붙이거나 더는 것도 조심스럽다. 스님의 낭독 그대로를 조심히 옮겨 담는다. 내 인생의 빛이 되는 이 말씀들이 글을 읽는 그들의 삶에도 빛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요, 또 내 맘에 때가 묻을 때마다 되뇌이며 옅게 나마 씻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행복의 조건 - 법정 스님

침묵은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 양식이다.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언젠가 명동에 있는 가톨릭 여학생관에서 무슨 강론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만일 성서를 편찬했다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기 전에 무거운 침묵이 있었노라고 기록했을 거라고.
그러자 어떤 남자 신도가 불쑥 일어나더니 그게 아니라며 태초에 말씀이 계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혼을 울릴 수 있는 말씀이라면 무거운 침묵이 배경이 되어야 한다. 침묵은 모든 삼라만상의 기본적인 존재양식이다. 나무든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 배경에는 늘 침묵이 깔려있다. 침묵을 바탕으로 거기서 움이 트고 잎이 피고 꽃과 열매가 맺는다.

우리는 안에 있는 것을 늘 밖에서만 찾으려고 한다. 침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 고여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늘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 따라서 밖으로 쳐다보려고만 해서는 안된다. 안으로 들여다보는 데서 침묵을 캐낼 수 있다.

침묵은 자기 정화의, 또는 자기 질서의 지름길이다. 온갖 소음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지키려면 무엇보다도 침묵을 몸에 익혀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홍수에서 어떻게 놓여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넘쳐나는 물량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 다음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이다.

정보와 지식은 선별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선별하지 않으면 정보와 지식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러다 보면 내가 내 인생을 스스로 살지 못하고 다른 의지에 의해서 내 삶이 끌려 다닌다는데 문제가 있다.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소음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침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침묵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그런 복잡한 얽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내 자신이 몸소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봐야 한다.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하라.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삼가라.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다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에 내 자신마저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지만, 침묵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간에 그 내부는 비어 있다. 말수가 적은 사람, 침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신뢰가 간다. 초면이든 구면이든 말이 많은 사람한테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나도 요즘에는 가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말 수가 적은 사람한테는 오히려 내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고 싶어 진다.

사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꼭 필요한 말만 할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말이 여물도록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쏟아내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습관이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불쑥불쑥 말해 버리면 안에서 여무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면은 비어있다. 말의 의미가 안에서 여물도록 침묵의 여과기에서 걸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고 심판할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어떤 낡은 자로써 한 달 전이나 두 달 전, 또는 며칠 전의 낡은 자로써 현재의 그 사람을 재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늘 잘못된 것이기 일쑤이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 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서 생명과 행복의 싹이 움트게 된다.

내적 변화는 생활의 질서에서 얻어진다.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적게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더욱 적을수록 더욱 귀하다. 그리고 더욱 사랑할 수 있다. 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우리에게는 모자라는 것도 더러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갖고자 하는 희망이 있다.

소유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필요한 것이 있더라도 꼭 필요한 생활필수품이 아니면 자꾸 뒤로 미뤄 보라. 그러면 세월이라는 여과장치를 통해서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인지, 없어도 좋은 것인지 그 기간에 판단이 선다.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저 필요하다고 해서 그때그때 잔뜩 사들여 보라. 그것은 추한 삶이다. 결국에는 물건더미에 깔려 옴짝 못하게 된다. 구하지 않아도 좋았을 그런 물건들이 우리 집안에 이구석 저구석을 다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행복의 조건은 우리 곁에 늘 깔려 있다. 들길을 가다가 청초하게 피어있는 한 무더기 구절초를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또 시장 골목을 지나치든가 무슨 건물 앞을 지나가는데 환하게 웃는 미소를 만난다면 그 미소를 통해서도 적어도 하루의 행복은 보장된다. 우리가 큰 것만을 바라기 때문에 우리 둘레에 널려있는 무수히 많은 행복과 고마움을 스스로 걷어차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다. 삶의 부피보다는 질을 문제 삶아야 한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살 줄 알 때 사람일 수 있다.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텅 비울 수도 있어야 한다. 텅 빈 곳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려 나온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에 있다. 자유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간의 청정한 본성인 사랑과 지혜에 가치 척도를 둬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 물질이나 정신이나, 밖으로나 안으로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또 온갖 관계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믿는 종교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에라도 얽매이면 자주적인 인간 구실을 할 수 없다.

무슨 일을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 일을 하되 그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얽매이면 그 일의 노예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하면서도 얽매이지 않으려면 자신의 청정한 본성에, 곧 지혜와 사랑에 가치척도를 두어야 한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다.
"해탈이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승이 되묻는다.
"누가 너를 그렇게 묶어 놓았느냐?"

이것이 답이다.  
누가 너를 일찍이 묶어 놓았는가.

인간은 본래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런데 일상적인 생활 습관이 잘못 들어 그 소용돌이에 스스로가 말려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 안에 영성이 있고 불성이 있다. 집에서 살림을 하든 밖에서 일을 하든 모든 것이 하나의 삶의 소재이다. 말을 하자면 굳이 따로 참선하고 염불 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 심성 자체가 지극히 신령스럽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마다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그 영성과 불성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대개 일시적인 충동과 변덕과 기분과 습관에 지배당하고 있다.  일시적인 흐름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자신을 맑게 들여다보는 그러한 훈련이 필요하다.

인생은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내 인생을 심화시킬 것에 마음을 두라.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한지 아닌지 수시로 따져 봐야 한다. 오늘이 어제와 똑같다면 그 인생은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한 달 전의 나와 한 달 후의 내가 똑같다면 나 스스로를 그렇게 가두고 있는 것이다.

변화가 없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삶이 침체된다. 삶에 나날이 변화를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일상이 진부하고 지루하고 따분해진다. 삶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늘 유동적인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지 이미 되어 버린 것은 아니다. 삶은 늘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우주의 흐름이요 실상이다.
위로 오르든 아래로 떨어지든 되어가는 어디에도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매달리게 되면 형성되어가는 그 흐름이 정지해 버린다.

행복은 늘 단순한데 있다. 가을날 새로 창을 발라놓고 방 안에 앉아 있으면 창호에 비춰드는 오후의 햇살이 얼마나 아늑하고 좋은가. 이것이 바로 행복이다. 그 행복의 조건을 도배사에게 맡겨버리면 자기에게 주어진 즐거움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손으로 해야 한다. 도배가 되었건 청소가 되었건 집 고치는 일이 되었건 내 손으로 할 때 행복이 체험된다. 그것을 남한테 맡겨버리면 내게 주어진 행복의 기회가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행복하려면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녀라. 몸에 대해선 얼마나 애지중지하는가. 얼굴에 기미가 끼었는가 아닌가, 체중이 얼마나 불었는가 줄었는가에 대해서는 최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우리들 정신의 무게가 정신의 투명도가 어떠냐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이다.
내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한다.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자기 분수를 헤아려 거듭거듭 삶의 질을 높여갈 수 있다.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은 결코 아니다. 그건 한 때일 뿐이다. 욕망은 새로운 자극으로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을 채워가는 삶은 결코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삶이란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그리고 내게 허락된 인생이, 내 삶의 잔고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을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하라.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른 아침, 자연을 벗삼은 시간은 참으로 맑았다..  2018.7.30 송계계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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