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

by 이레재

사십여 년을 살아오며, 인생의 고비마다 무수한 파도에 휩쓸려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단 두 가지, 확실한 진실을 얻었다. 첫째,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정말로 어떻게든 되어 있다는 것. 삶은 내가 조종하는 줄 알았지만, 결국엔 삶이 나를 데려가고 있었다. 둘째, 누군가를 영원히 미워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 미움조차도 오래 품기는 힘들다. 그 감정마저도 결국은 흐려진다.


인생은 내가 뜻하는 대로만 흐르지 않지만, 돌아보면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완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아등바등 긴장하며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는 믿는다. 이 두 가지를 깨달았을 때, 나는 마치 인생의 한 꼭짓점을 넘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뜻밖에도 공허함이 찾아왔다. 삶을 집어삼킬 듯한 사건과 사고들이 끊임없이 몰아쳤는데도, 나는 그것들에 깨어지지 않았다.


긍정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작은 힘이 내 안에 남아 있었다면, 그건 아직 이 삶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엉망진창으로 무너진 내 삶도, 결국엔 스스로 자리를 찾아간다는 것. 그게 내가 이 삶에서, 가장 깊이 체득한 진실이다. 나에게 공허는 오래도록 오해받아온 감정이었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상태.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정적. 하지만 나는 안다. 공허는 무너짐의 잔해를 쓸어낸 자리에만 고요히 앉는다. 그건 텅 빈 게 아니라, 무언가가 지나간 자리다.


싸움이 끝나고, 눈물이 그치고, 원망마저 스러진 후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감정. 나는 그 공허함 속에서 내 마음의 진짜 소리를 들었다. 바쁘게 살아갈 때는 들리지 않던, ‘이제는 괜찮아’라는, 내 안에서 흘러나온 조용한 속삭임. 공허는 나를 아프게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나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였다.


공허를 지나고 나니,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삶을 안고 허둥대는 것을 본다. 나는 이제 그 한가운데서도 조용히 숨 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마음은 여전히 출렁이고, 삶은 여전히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더는 나를 부러뜨리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안다. 삶이란 결국, 조금씩 자신에게 돌아오는 여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여정의 어느 고요한 밤에 찾아오는 공허함마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한 조각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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