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같은 자리에 앉는 이유

- 반복과 변주

by 서히

저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붓을 듭니다.
사실 특별한 각오나 대단한 예술적 의지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 버리면 소중한 하루가

손가락 사이로 허망하게 빠져나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커피를 내리는 손의 순서도 늘 비슷합니다.
물을 붓고, 기다리고, 향이 퍼지는 시간을 잠시 견디는 일.
그 모든 과정은 놀라울 만큼 반복적이고,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지 화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지루해 보이는 루틴을 매일 통과하다 보니,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그 반복 속에 아주 미세한 ‘다름’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요.


지루함이라는 오해

반복은 흔히 지루함의 다른 이름으로 오해받곤 합니다.
새로울 것이 없고, 이미 다 아는 것을 또 하는 지겨운 숙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반복을 벗어나려 애쓰고,

무언가 드라마틱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애를 씁니다.

하지만 작업을 이어오며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변주(Variation)는 대개 의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변화는 반복이 충분히 쌓였을 때 비로소 조용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같은 동작을 수없이 되풀이했기에 아주 작은 흔들림도 크게 느껴지고,
늘 하던 방식이었기에 단 1mm의 어긋남조차 질문으로 떠오릅니다.

결국 반복이란 무언가를 똑같이 찍어내는 장치가 아니라,
변주를 알아볼 수 있는 감각을 길러주는 훈련에 가깝습니다.


“오늘도 여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저 같은 신진작가에게 반복은 단순한 성실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작업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올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는, 일종의 마음의 구조에 가깝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붓을 드는 일은
“오늘도 대작을 만들어내자”라는 비장한 다짐이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말하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오늘도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겠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작업은 조금씩 태도를 바꿉니다.

“무엇을 그릴까?”에 집중하던 시간이

“내가 지금 이 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시간으로 옮겨갑니다.

오늘따라 왜 손이 유독 무거운지,
왜 이 지점에서 자꾸만 망설이게 되는지.

반복은 우리를 앞으로 밀어붙이기보다,
오히려 더 깊은 안쪽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미세한 이동이 만드는 고유한 리듬

변주는 그렇게 도착합니다.
눈에 띄는 화려한 변화가 아니라,
작가 자신만 겨우 알아차릴 수 있는 미세한 이동으로요.

선 하나를 긋는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지고,
여백의 고요함을 견디는 시간이 1초쯤 길어지며,
작업의 중단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한결 느슨해집니다.

겉으로 보면 여전히 똑같은 날들의 연속이지만,
우리 안쪽에서는 분명히 어제와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려 합니다.

“어떻게 더 특별해질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나는 어떤 리듬으로 이 일을 오래, 기쁘게 계속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대개 거창하지 않습니다.
매일 같은 자리, 같은 시간, 같은 손의 감각.
그 단순한 조건들이 오히려 우리를 가장 멀리 데려다줍니다.

반복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방향만큼은 잃지 않게 해 주니까요.


반복은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지루한 관성이 아닙니다.
어제와 오늘의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며,
나만의 고유한 리듬을 길러가는 가장 정직한 수행입니다.

변주는 새로움을 증명하려 애쓸 때가 아니라,
이미 충분히 반복하며 나를 그 자리에 두었을 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도착합니다.



좌표 25. 반복과 변주

반복은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일이 아니라,
다름을 알아볼 수 있는 감각을 하루하루 길러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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