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노동에 대한 미학적 사유

-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을 따라

by 서히

돌봄 노동의 가치는 오래도록 존재해 왔지만,
그 가치를 설명하는 언어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돌봄은 늘 수행되어 왔지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루어졌고
말해질 언어를 갖지 못했다.
그 결과 돌봄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보이도록 배치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Jacques Rancière, 1940 ~ )
한 사회가 무엇을 감각으로 인정하고,
누가 말할 수 있는 주체로 등장하는지를
‘감성의 분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단순한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가 어떤 질서로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감성의 분할은
무엇이 보이고,
어떤 소리가 의미로 들리며,
어떤 반복이 소음으로 처리되는지를 결정한다.
이 질서 안에서 돌봄 노동은 오랫동안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설거지의 반복,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는 조용한 움직임.
이 감각들은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 사적이며,
너무 관계적이라는 이유로
‘중요한 감각’의 범주에서 배제되었다.


돌봄은 시행되었지만
기록되지 않았고,
소리는 있었지만
의미로 번역되지 않았다.
그래서 돌봄은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돌봄이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돌봄이 애초에 노동으로 가시화되지 않도록 분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의 언어로 말하자면,
돌봄 노동은 오랫동안 정치 이전의 질서,
즉 ‘치안’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었다.
각자의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고,
돌보는 이는 말하지 않으며,
그 소음은 그냥 background로 흘러가야 하는 자리.

정치는 그 자리가 흔들릴 때 시작된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소음이 발화로 전환되며,
말할 수 없던 존재가
자신의 자리를 다시 주장하는 순간.


이러한 의미에서
돌봄 노동을 예술로 다시 보여주는 일은
사회 참여나 윤리적 호소를 넘어
분명한 미학적·정치적 사건에 가깝다.

예술은 지워진 감각을 다시 감각으로 불러오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돌봄의 반복을
소모가 아닌 리듬으로,
희생이 아닌 구조로,
소음이 아닌 기척으로 다시 배치한다.

이때 돌봄 노동은 비로소 ‘보이는 것’이 된다.
감정이 아니라 기술로,

관계가 아니라 구조로,
사적인 일이 아니라
삶을 유지하는 근간의 움직임으로 등장한다.


돌봄 노동에 대한 미학적 사유란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감각이 중요하게 느껴져야 하는지,
누가 말할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할 수 있는지를
다시 묻는 일이다.


즉, 배치된 감각의 질서를 다시 구성하는 작업이다.

돌봄을 다시 바라본다는 것은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이 질문을 다시 던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돌봄은 더 이상 조용히 수행되는 배경이 아니라
세계의 전면으로 나오는 사건이 된다.

돌봄 노동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다만, 감성의 질서 밖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

예술은 그 질서를 흔들며

보이지 않던 노동이 머물 자리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만들어낸다.
그 자리에서 돌봄은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세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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