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틀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움직임

by 서히

형식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허용되는지 알려주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업을 이어갈수록
나는 형식이 언제나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어떤 순간에는
형식이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감각을 앞서 결정해 버리기도 한다.
그때 형식은 보호막이 아니라
움직임을 제한하는 틀이 된다.


형식은 도구이지 목적은 아니다

형식은 필요하다.
아무런 기준도 없이 작업을 시작하기는 어렵다.
형식은 출발점이 되고,
작업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형식이 목적이 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형식을 지키기 위해 감각을 누르고,
틀에 맞추기 위해 질문을 접어두게 될 때,

작업은 점점 경직된다.

그래서 나는 묻게 된다.
형식은 나를 돕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대신해 결정하고 있는가.


형식을 버린다는 것은 무작위가 되는 것이 아니다

형식을 버린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그린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형식을 내려놓는 순간
감각은 더 예민해진다.
다음 선을 어떻게 놓을지,
어디에서 멈출지,
무엇을 비워둘지
모든 판단을 다시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형식이 사라진 자리에
주의 깊음이 들어온다.
이때 작업은
규칙을 따르는 행위가 아니라
매 순간 선택하는 일이 된다.


틀을 벗어날 때 드러나는 나의 리듬

형식을 따를 때는
나보다 규칙이 앞선다.
그러나 형식을 내려놓으면
비로소 나의 속도가 드러난다.


선이 빠르게 나아갈 때도 있고,
뜻밖의 지점에서 멈추기도 한다.
반복하던 방식이 끊기고,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 열린다.


그 흐름 속에서
나는 내 작업의 리듬을 인식하게 된다.
어디에서 망설이는지,
어디에서 과감해지는지,
어떤 순간에 물러나는지.


형식을 버린다는 것은
이 리듬을 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형식의 해체는 질문을 다시 여는 일이다

형식은 질문을 빠르게 닫아준다.
이미 답이 정해진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예술은
쉽게 닫힌 질문 위에서 오래 머물지 않는다.

형식을 내려놓으면 질문은 다시 열린다.
이 선은 왜 여기서 시작되는가,
이 색은 왜 지금 필요한가,
이 화면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형식을 버리는 순간
작업은 다시 질문의 상태로 돌아간다.
나는 그 질문 앞에
조금 더 솔직하게 서게 된다.


나는 형식을 버리기보다, 형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나는 형식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으려 한다.
필요할 때는 사용하고,
감각을 가리기 시작하면 내려놓는다.

형식을 버린다는 것은
결단이 아니라 태도다.

끊임없이 감각을 확인하고,
형식이 나를 대신해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점검하는 일이다.

그렇게 형식과 거리를 조율할 때
작업은 다시 살아 움직인다.


작가메모.

형식을 버린다는 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더 책임 있게 선택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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