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곳하게 핸드폰 앞에 앉았다. 정갈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 되새겼다. ‘나는 대범하다, 나는 대범해….’ 난 다 큰 어른이잖아. 그러니까 면담에서 치프가 어떤 얘기를 하던, 떨지 말고 잘 받아들여야지. 전화기를 뚫어지라고 쳐다보며 기다리자, 곧 약속된 시간에 벨이 울렸다.
“안녕 Ju! 오랜만이네. 지금 한국은 저녁시간이지?”
“네, 치프.”
“하하, 목소리가 평상시랑 다르네. 긴장했어?”
“네, 치프.”
자동 응답기처럼 대답하는 내 목소리를 듣고 치프가 웃었다. 그는 긴장 풀라며 이런저런 얘기를 먼저 시작했다. ‘월말 평가’이기는 하지만 편안한 미팅처럼 생각하라고. 그리고 우선 이렇게 물었다.
“YV 식구가 된 지 벌써 한 달이 조금 넘었네. 지금까지 일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어? 아니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그건 예상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치프가 나에게 어떤 평가를 내려줄지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뭐라도 대답은 해야 했다. 그래서 준비된 것 없이, 그저 내가 느낀 점을 솔직하게 말했다.
“어…. 사실 크게 불편한 점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치프가 워낙 잘 도와주시니까…. 그리고 제 사수님 재키도 정말 많은 걸 가르쳐주시고요. 지금껏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첫 직장 생활을 하며 훨씬 많은 걸 배웠거든요. 그런데 돈까지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오히려 YV에 제가 배우는 비용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말이에요. 저, 혹시 제가 너무 많이 받는 건 아니죠?”
치프는 그 말을 듣고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Ju.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넌 진짜 웃긴 친구야. 일하면 당연히 돈을 받아야지. 특히 너처럼 열정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만은 않거든. 네가 YV에 들어와서 다들 행복해하고 있어. 대빵 치프도 그러더라. 취업 비자 문제로 힘들었던 게 보람이 있다고. 나, 사람 잘 뽑았다고 칭찬받았잖아.”
“우와…. 정말요? 다행이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하는 일에 좀 더 자신감을 가져. 그리고 힘든 점은 나에게 말해 줘야 해. 알다시피 우리 회사는 잘 성장하고는 있지만, 아직 스타트업이라 체계성을 완벽히 갖추기가 어렵잖아. 그래서 프로젝트 방향성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많아. 당연히 여러 가지 힘든 일들도 많을 거야. 그걸 같이 해결해 나가야 회사도 발전하지.”
무슨 이런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상사가 다 있지? 이거 현실인가? 의문을 잠시 뒤로하고 치프가 해 주는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치프가 해준 말은 직장 생활에서 꼭 필요한 현실적인 조언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난 그걸 마음속에 새겨두고 있다.
1.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마.
“Ju, 우린 네가 얼마나 진심 어린 노력으로 YV의 일을 맡아주고 있는지 알아. 그리고 나, 재키, 대빵 치프 등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고마워하고 있어. 하지만 중요한 건 네 건강이야. 모든 직장 생활은 장기전이거든. 매일 한 걸음씩 간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 나가면 되는 거야. 난 열의를 가지고 일하다가 번아웃이 온 사람들을 많이 봤어. 한계를 모르고 일하다가, 퓨즈가 끊어지는 거지. 그렇게 되면 네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기업에게도 손해란다. 제일 중요한 건 멈출 때를 아는 거야. 알았지?”
2. 돈은 욕심이 아니라, 노력의 대가야.
“너도 알다시피, 난 큰 금융회사에서 오랫동안 일 해본 경험이 있어. 그러면서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봤지. 세상엔 부도덕한 일로 돈을 버는 사람들, 아무런 노력 없이도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오로지 자기 통장의 숫자가 오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더라. 마치 숫자 게임에 중독된 것처럼. 문제는 그런 사람들은 그 게임에 빠져서,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신경을 안 쓴다는 거야. 당연히 그들이 투자하는 기업은 악순환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사회적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들일수록, 노력에 대한 대가를 더욱 정당히 받아야 하는 거야. 돈에 대한 철학이 명확한 사람들이 그 흐름을 주도해야 세상에 이롭잖아. 그러니까 일한 만큼 돈 많이 벌고, 미안해하지 마. 그렇게 버는 돈은 ‘욕심’이 아니니까. 네가 일한 것에 대해 받아야 할 마땅한 권리야.”
3. 시간 관리와 일 처리는 네 리듬에 맞춰.
“아까도 얘기했지?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건강한 직장 생활을 하려면, 일단 네게 맞는 업무 스타일을 찾아야 해. 사실 난 디자인 작업에 대해 잘 몰라서, 어떻게 일하는 게 최적인지 알려 줄 수는 없을 것 같아. 하지만 한 달 정도 직장 생활하면서 익힌 것들을 정리해 봐. 아침 몇 시부터 저녁 몇 시까지 일 하는 게 제일 네 리듬에 맞았는지, 휴식 시간은 얼마큼 필요했는지. 그럼 그게 네 생활 스케줄 표가 되는 거야. 당연히 그에 따라서 업무량은 상의하며 조절할 수 있는 거고. 회사 생활과 개인적인 생활을 잘 조율하는 게 롱런하는 비결이거든. 물론 큰 기업에선 그게 좀 더 어렵겠지만, 우리 회사는 그걸 도우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 그게 스타트업의 장점 아니겠니.”
4. 네가 하는 프로젝트에 주도권을 가져.
“시키는 대로만 하다 보면 네 목소리를 내는 법을 절대 배울 수가 없어. 그래서 항상 깨어있는 머리로 생각해야 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네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점검해 보는 게 중요해. 나, 재키, 릴카, 심지어 대빵 치프 조차도 그냥 그 프로젝트를 돕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돼. 네 프로젝트의 주인은 너라는 걸 잊지 말고. 그런 마음으로 일하면 일의 주도권을 가지고, 스타트업이 운영되는 방식을 이해하기 더 쉬울 거야. 혹시 모르지, 만약 나중에 네가 개인적으로 창업을 하고 싶을 때가 온다면 그 습관이 도움이 될지.”
5.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는 걸 기억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야. 언제, 어떤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네가 후회하지 않을 일들을 하며, 진짜 좋아하는 것, 해 보고 싶은 것을 해 봐. 물론 YV에서의 일도 중요하지만, 만약 네 적성에 안 맞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한다거나, 시도해 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같이 상의해 보자. 싫어서 하는 일들은 결국 능률도 오르지 않고 스트레스만 쌓이거든. 그럼 회사와 네게 둘 다 손해 아니겠니? 우리 회사에서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즐겁게 일하는 사람들을 원해. 그런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회사의 미래에 참여하려고 노력하니까.”
차근차근 말하는 치프의 모습을 보며,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회사 대표가 직원에게 직장 생활을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라니.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니. 지금껏 "뭐든 시켜만 주세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가 입에 밴 나에게, 그는 그러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하지 않다며.
또 한 가지 놀란 점은 그가 말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치프와의 면담에서, 내 업무 능력에 대한 자세한 평가가 이어질 줄 알았다. 예를 들어, '음, 넌 이건 잘하고 저건 좀 떨어지는 것 같아. 그러니까 다음엔 요런 걸 더 신경 써. 그래서 이번 평가 점수는 몇 점이고, 다음 평가 때까지 더 분발하도록 해.' 이런 식으로.
하지만 치프는 상사 이전에 멘토로 나에게 인생에 대한 조언을 해 주었다. 그에게는 내 업무 능력을 낱낱이 평가하는 것보다도,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업에서 성장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치프는 이렇게 말했다.
"첫 한 달 동안 정말 훌륭하게 해 줬어, Ju. 다음 달은 더 기대가 되는구나. 팀원들 모두 네가 인내심 많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일하는 네 태도에 놀란 것도 물론이고. 넌 한국에 있어서 들을 수 없겠지만, 여기선 디자인 슈퍼스타라고 불리고 있어! 그런데 정말 중요한 건 이거야. 나는 네가 YV 회사에 맞춘 인생을 사는 것보다, 네가 원하는 삶을 사는 방법 중 하나가 YV에서 일하는 것이 되길 바라. 알겠지?"
우와, 이건 반칙이지. 열심히 하지 말라면서, 더 열심히 일하고 싶게 만들다니! 치프의 진심 어린 말들을 들으며 ‘직원 동기부여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를 느꼈다. 치프는 분명, 직장의 사람들이 회사를 사랑하게 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마침내 긴 통화를 잘 마무리한 나는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와…. 진짜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YV에 충성한다.”
전화를 끊고 치프와의 대화를 되새기는데, 감동의 물결이 넘실넘실 밀려들어왔다. ‘진짜 이런 상사와 소통할 수 있는 직장이 또 어디 있겠어. 안 그래? 나는 참 운도 좋지, 하하. 내가 이러려고 스위스로 가서 그 고생을 했던 거구나. 이건 운명이었어!’ 결국 운명론까지 등장시키며, 그간 일러스트레이션 때문에 힘들었던 묵은 체증은 마치 위장약을 먹은 듯 싹 아래로 날려버렸다. (내가 이렇게 조련이 쉬운 사람이다.)
하지만 치프의 말처럼, 역시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곧 날벼락같은 일이 터졌다. 내 충성 어린 마음을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아. 내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건지, 직장을 다니고 있는 건지.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YV에서 또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