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

직장 내 적자생존의 법칙, 변화에 적응하기

by 이서후

“어, Ju. 문제가 생겼어. 방금 외부 UI 디자이너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치프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와 있었다. 순간 듣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까지 했던 일러스트레이션 프로젝트가 완전히 무산되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회사 측에서 웹사이트 디자인 수주를 맡겼던 외부의 UI 디자이너였다. 지금껏 외국인인 나와의 소통을 거부하며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가, 치프와 대빵 치프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봐, 대표님들. 스위스에서 저런 이국적인 일러스트레이션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그리고 난 웹사이트에 그림을 쓴다는 생각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지만 굳이 일러스트레이션을 쓰고 싶다면, 내가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를 소개해줄 수 있어. 내 칠 년 지기 친구인데 일자리를 찾고 있거든. 그 사람도 믿을만한 스위스 사람이야.”


나중에 들은 말인데, 2주에 한 번씩 일했던 외부 디자이너는 자신이 스위스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팀에서는 그를 합류시키느라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좀 후회했다고 들었다.) 대빵 치프는 외부 디자이너를 고용하느라고 든 비용의 본전을 생각하여 그의 말을 따르자고 했단다. 그때 재키는 공교롭게도 가족에게 문제가 생겼는지 휴가를 떠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치프는 이 상황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치프는 일단 상황이 수습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어쨌든 더 이상 일러스트레이션을 못쓰게 되었으니, YV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음성 메시지는 미안하게 됐다는 말과 함께 끊어졌다.


“······.”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고생해서 한 일이 고작 외부 프리랜서 한 명의 의견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 것이구나. 일단 심호흡을 했다. ’ 괜찮아. 그 사람도 나름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리고 배타적인 스위스 사람들을 많이 봐 와서 알잖아. 이런 상황이 올 수록 유연하게 대처해야···.’


감정을 다스리려고 애써 노력했지만, 점점 울분이 차 올랐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찾은 열정의 기쁨에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그 나라에서는 내 존재를 환영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걸.


그곳에서 만난 대부분 사람들은 뭐든 열심히 하는 내 천성을 싫어했다. 새로운 것을 배울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편입한 대학에서부터 그랬다. 발표를 성의 있게 하면 (심지어 교수님이) 다른 학생들 기죽게 왜 튀는 행동을 하냐며 눈치를 주었고, 과제를 열심히 하면 뒤에서 ‘일에 미친 동양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안 그런 친구들도 몇은 있었지만, 그들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나에게 살갑게 대하지는 않았다. 다국적 사람들이 모여있는 직장에서는 좀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어디 가나 배타적인 사람들 한 둘이 있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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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어어! 나빠!”


눈에서 눈물이 막 새어 나왔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법이었다. 치프의 말 중에 ‘YV에서 할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말이 걸렸다. 자칫하면 한 달 만에 해고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YV가 원래 디자이너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었던 회사였던 만큼,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가 회사의 상황에 잘 적응해야 했다.


눈물을 훔치고 치프에게 메일을 작성했다. 일단 상황을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회사의 상황을 이해한다는 나의 입장을 말하고, 내 감정을 떠나서 YV에게 최선인 결정을 지지한다고 했다. 다른 프로젝트들도 맡겨만 준다면 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적었다. 메일을 보내고 숨을 가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여기서 감정이 상해서 깨져 나가면 안 돼. 적자생존이랬어. 살아남으려면 적응해야 하니까, 끝까지 버티자!”


그리고 그날 저녁, 치프에게서 또 하나의 음성 메시지가 왔다.


“음···. 우선 메일 줘서 정말 고마워, Ju. 다시 한번 네 침착한 태도에 사람들이 많이 놀랐어. 당연히 마찰이 심하게 날 줄 알았거든. 쿨하게 받아들여줘서 고마워. 재키가 휴가에서 돌아오면, 곧 다른 프로젝트를 찾게 될 거야. 그리고 전에 보냈던 메시지에 대해 좀 사과할게. 마치 네가 지금까지 한 일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들렸을까 봐 걱정되네.”


우울했지만, 그래도 나를 생각해주는 치프가 고마웠다. 그때는 이 일이 훗날 내가 맡게 될 다른 프로젝트의 새로운 길을 열어줄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저 무너져버린 마음을 정리하느냐고 급급했다. 내가 딱했는지, 릴카가 힘내라며 짧은 문자를 보내왔다. 그 계기로 서로 몇 마디가 더 오가며 점차 친해지게 되으니, 지금에서는 오히려 새옹지마였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도 나는 곧 새로운 프로젝트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것은 외부 디자이너가 맡던 웹사이트 UI였다! 이게 무슨일인가 싶었는데, 곧 릴카로부터 외부 디자이너가 일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그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과도 마찰이 좀 있었던 것 같았다.) 재키와 릴카의 도움으로, 나는 회사의 웹사이트에서 중요한 페이지들을 디자인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럼 그동안 했던 일러스트레이션은 어떻게 됐을까?


다음 글에는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잊힐 뻔한) 일러스트레이션을 어떻게 재활용하여, 깜짝 선물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겠다.


다음 글: 13. 스위스로 가지고 간 깜짝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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