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일이 아니야. 사람이지.”

반짝이는 신입으로 살아남는 커뮤니케이션 방법

by 이서후

(*커뮤니케이션 팁 여섯 가지는 글 후반에 있으니, 참고하기.)


“어디 보자. 오늘은 치프 빼고 재키랑만 체크인이 있네. 휴우, 그래. 괜찮을 거야.”


처음으로 사수님인 재키와 단 둘이 브리핑 시간(체크인)을 갖는 날이었다. 설렘 반, 긴장 반의 표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화상 통화 창이 열린 컴퓨터 화면 너머로 곧 재키의 모습이 보였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순간, 재키의 뒤로 불쑥 나타난 치프가 보였다. 재키와 통화하는 나를 발견한 치프가 장난스럽게 튀어나와서 손을 흔들고 사라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서서히 눈치채기 시작했던 것 같다. 치프는 딱 봤을 때 엄청 프로 같은 이미지를 풍기지만, 사실 속을 알고 보면 마냥 짓궂은 아이 같을 때가 많다는 걸.)


"……."


예상치 못한 치프의 웃긴 등장에 재키와 나는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다시 차리고, 웹사이트에 올릴 일러스트레이션에 대해 상의했다. 주제는 스위스를 대표할 수 있는 이미지인 산, 호수 등의 자연 풍경이었다. 지속가능적인 개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의 이미지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또한 고객들에게 스위스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각인시켜, ‘스위스 프리미엄’을 상기시켜 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후로 마터호른을 얼마나 그려댔는지 모른다. 아직까지 두 눈을 감고도 그 산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듯하다.)


불멸의 마터호른. 이 사진을 찍는 순간조차도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했던 생각에 웃음이 났다.


이윽고 어느 정도 회의가 마무리되자 재키가 물었다. “좋았어, Ju. 그럼 지금부터 필요한 아이디어 스케치를 몇 개 해 보고, 치프와 논의해서 그중 어떤 걸 발전시킬지 정해보자. 내일까지 가능하겠어?” 나는 열의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당연하죠! 오늘 내로 시안을 뽑아서 드릴게요." 재키는 내 열정이 마음에 든다며 웃으며 말했다. “하하, 훌륭해!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아아…. 이때 재키의 말을 좀 새겨들을 걸 그랬다.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한국인 특유의 정서인 ‘빨리빨리 문화’는 디자이너에게 치명적인 번아웃을 부르는 지름길이라는 걸.


잠깐 상황 설명을 하자면, 당시 YV는 웹사이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재키는 주로 UX 디자인 작업을 하는 데 열중했고, UI에 전문가인 외부 디자이너가 주 1-2회씩 웹사이트 이미지의 큰 틀을 손 보는 중이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디테일한 부분을 채울 일러스트레이션, 이미지, 아이콘 등을 모두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과의 매끄러운 의사소통이 필수 과제였다. 프로젝트 지시자인 치프, 매니저인 사수님 재키, 외부의 UI 디자이너, 개발 팀의 릴카 등이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하는 일에 때때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줘야 하는 대빵 치프도 있었다.) 만약 그중 누군가와 대립해서 껄끄러워지게 된다면 아주 골치 아픈 상황이 발생할 게 뻔했다. 그렇기에 사실상 이번 프로젝트 성공의 여부는 '소통'과 '인내심'에 달려 있었다.


“음, 저런 스타일로 다시 그려 줘.”

“여기서 빨간색을 쓰면 안 될까?”

“지금 완성한 그림도 좋은데, 다른 콘셉트로 다시 해 보자.”

이번 건 다들 괜찮아하는데, 누구 한 명이 반대했어. 자기가 좋아하는 느낌이 아니래.”

“아니야. 저번 거로 하자. 그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런 소리를 주 45시간 이상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거울을 확인하게 된다. 혹시나 머리 뚜껑이 열려서 김이 새어 나오지는 않는지. 하지만 그걸 오롯이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면 건강에 해롭다. 대학 생활에서 과제를 하며 익히 배웠듯이, 속칭 '빠꾸'는 그저 디자이너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게 깔끔하니까.(하하)


아무튼 그렇게 약 한 달간의 작업을 하며 다양한 스타일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만들어냈다. 지금 보니 Ai를 이용한 벡터 그림에서부터 아날로그 일러스트레이션, 디지털 드로잉 등 참 여러 가지 시도를 했구나. 뭐, 그만큼 다양한 툴을 이용했으니 개인적으로는 좋은 공부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작업한 스타일들. 대충 간추려 놓은 것인데도, 한 군데 모아 놓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사실, 금융회사의 웹사이트에 아날로그 일러스트레이션을 넣는 경우는 썩 많지 않다. 여기서 치프와 대빵 치프, 그리고 UI 디자이너의 의견 충돌이 좀 있었다. 지금도 여러 장면들이 머릿속을 생생히 스친다. 화상통화로 보고 들었던 그들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나의 모습···. 눈치 보는 신입으로서 새우등 터지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당시 아직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릴카는 사사건건 완성 직전의 작업물들에 반기를 들었다. 나는 그녀와 의견 차를 좁히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문제는 디자인보다도 감정적인 부분에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 해결책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내 생각을 그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메인 화면 일러스트레이션. 역시, 콘셉트는 불멸의 마터호른.

인간은 여러 면에서 상당히 비이성적인 감정의 동물이라고 한다.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만 같은 디자인의 영역에서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열정 많은 초짜 직장인 (혹은 디자이너)들의 신체적, 심적 건강을 위해 몇 가지 커뮤니케이션 꿀팁을 공유하고자 한다. 만약 과거의 나처럼 급한 성격을 가지고 프로젝트에 덤비려고 한다면, 손금에 새겨진 생명선이 스트레스 때문에 점점 짧아지게 될 것이므로.




행복한 직장 생활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꿀팁


1. ‘IMHO 수법’


일종의 예의 바른 디펜딩(defending) 기술이다. “In My Humble Opinion~”이라고 하면, “부족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정도의 겸손한 표현으로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어필할 수 있다. 일단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다가 침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면, ‘이보쇼, 이제 당신이 내 생각을 들을 차례요.’라는 조용하지만 강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억울한 마음에 마구잡이로 덤비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2. ‘아, 그럼 이건 어때요?’ 수법


제3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웅장한 마터호른 그림이 좋다고 하고, 다른 사람이 고요한 취리히 호수 그림이 좋다며 우긴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 새로운 중재안을 낸다. “아, 그럼 마테 호른 아래에 호수를 넣은 그림은 어떨까요? 보는 사람의 시선이 강직한 느낌의 산에 먼저 머물다가, 곧 넓고 시원한 호수로 향하게 될 거예요. 물론 자연을 강조하는 우리 아이디어는 유지될 거고요.” 그렇게 해서 낸 결과가 성공하면 실력 있는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노력하는 디자이너가 되니까 잃을 게 없다.


3. ‘좋은 의견 감사해요’ 수법


상대방의 결계를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기술이다. 의견 마찰이 있을 때, 서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상대방에게 주입하기 위해 바빠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영어로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그 설전의 스트레스는 어마 무시하다!) 그럴 때는 일단 상대방이 시간을 내서 내 일에 신경 써 주는 것에 감사를 표한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존중받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같은 존중으로 나를 대해줄 확률이 높다. 일단 서로의 방어막이 느슨해지면 의견 교류가 훨씬 쉬워진다.


4. ‘나는야 일처리 전문가’ 수법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기술이다. 브리핑 자료를 미리 정리해서, 상대방이 검토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회의 시 내 쪽에서 전달할 항목이 말끔하게 정리된 보고서 (1-2페이지)를 첨부하고, 내용에 대한 세네 줄의 메시지를 함께 보내 놓는다. ‘곧 있을 회의가 기대된다’, ‘바쁘실 테지만 검토 부탁드린다’ 등의 예의 바른 인사는 덤. 그렇게 하면 적극성, 전문성, 성실함과 겸손함 모두를 보여줄 수 있다.


5. ‘난 화날 때마다 웃지’ 수법


고난도 기술이다. 상황이 도무지 답이 안 나오고, 싸우기 직전이다 싶을 때 용이하다. 순발적으로 올라오는 화를 침을 인(忍) 자로 눌러야 한다. 여유를 가지고 능청을 떤다. “하하하, 아이고. 정말 열심히 했는데, 또 해야 하는구나~! 우리가 토의한 내용을 기반으로 작업한 건데, 문제가 있었다니 속상하네요. 음, 혹시 제가 더 추가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이 있을까요?”라는 식으로 대처하면서 분위기의 긴장도를 낮춘다. 화풀이는 전화를 끊고 나 혼자서 베개를 흠씬 두들겨 패며 해도 되니까.


6. '네게 감동을 선사한다’ 수법


초고난도 기술이다.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위의 다섯 가지 수법 중 반 이상을 마스터할 것. 그리고 그 태도를 유지하며 일정 시간을 쌓아 나갈 것. 극악의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진심을 다해 직장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면 된다. 경험담인데,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 진심에 감동을 받는다. 그렇게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직장 동료를 넘어, 훌륭한 친구가 될 수도 있다. (훗날 나와 릴카처럼.) 즉, 이 기술은 실력과 경력을 넘어 사람을 얻는 방법이다. 그리고 어렵게 얻는 값진 친구들은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보물이 된다.


위의 여섯 가지 방법은 스타트업 생활의 현실에 직접 부딪히며 깨달은 사실이다. 물론 이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니, 자신에게 알맞게 직접 응용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저 팁들이 내가 겪은 것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누군가의 한숨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보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 다음 글에서는 치프가 저런 태도를 가지고 일한 내게, 어떤 말과 조언을 해 주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너무나 떨리는 첫 월말 평가! (짓궂은 아이에서 다시 멘토로 돌아온) 우리 치프는 과연 나를 어떻게 평가했으려나?


다음 글: 11.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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