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을 빗나간 첫인사 날

"안녕하세요, 공주님?"

by 이서후

이른 아침, 알림이 울리기도 전인데 벌떡 일어났다. 떨리는 날이다. “오늘은 드디어 YV분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니까 예쁘게 입어야지~!” 한껏 들떠서 옷장을 열었다. 뭘 입을까 고민하다가, 맑게 개인 날씨에 어울리는 하늘색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허리띠를 매야하는 옷이어서 앉을 때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때, 몇 시간만 잠깐 입는 건데. 숨 좀 참고 있으면 되겠지. 헤헤 거리며 들뜬 마음으로 트램에 올랐다.


YV가 임팩트 허브 근처에 있는 건물로 사무실을 확장해 옮겼기에, 이번에는 새 건물을 찾아가야 했다. 세계 어디를 가나 길치로 유명한 나로서는 상당히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구글 맵의 도움을 받아서 두리번거리며 용케도 찾아냈다. 심호흡을 하며 대문의 벨을 울리니 누군가가 문을 열어줬다.


그런데 안에서는 예상과는 너무 다른, 엄청난 혼란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분주하게 오가는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과 여기저기 놓여있는 페인트 통, 드릴과 각종 잡다한 기구가 눈에 들어왔다. 약간 어안이 벙벙해져서 가만히 서 있는데, 그 혼란을 뚫고 치프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리고 차려입은 내 모습을 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이야! 멋진걸? 안녕하세요, 공주님?”


나는 멋쩍어서 어쩔 줄 몰랐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치프는 나무처럼 서 있는 나를 보고 껄껄 웃었다. 그리고 나를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주변 사람들에게 ‘다들 Ju의 예쁜 옷을 망가지지 않게 조심해!’라고 외치며 나를 소개했다. (부끄러워서 죽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작업복을 입고 페인트 투성이가 된 사람들은 모두 YV의 직원이었다. 그중에는 심지어 내 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주신 변호사 분도 있었다. 여러 사람들과 정신없이 인사를 하는데, 어떤 맘씨 좋아 보이는 분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셨다.


“오, Ju! 정말 예쁜 분이네요! 저는 재키(Jacky)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이거 어떡하나, 지금 손에 페인트가 묻어서….”


반갑게 그 분과 인사를 나누는데 치프가 슬쩍 말했다. 재키가 나의 사수님이 될 디자이너라고. 오늘 서로를 만나게 해 주려고, 일부러 나를 부른 것이라 했다. 그분은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의 디자이너로 일 하셨던 대단한 베테랑이셨다. 큰 회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 봤으니, 이제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YV에 오게 되셨다고 했다. (이어서 그분이 나에게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자기도 오늘 치프가 불러서 왔는데, 이렇게 페인트를 칠하게 될지는 몰랐기에 적잖이 당황했다고.)


이윽고 다른 팀원들과도 차례로 인사를 마치자, 치프 뒤로 키가 큰 대빵 치프가 나타났다. (치프도 키가 큰 편인데, 대빵 치프는 진짜 엄청 컸다. 키가 무려 2미터! 무셔….) 하지만 큰 키가 주는 위압감에 주눅드는 것도 잠시, 나는 곧 대빵 치프의 품에 안겨있던 아기한테 홀딱 반해버렸다. 볼살이 통통하고 찹쌀떡처럼 말랑한 아기는 순수한 귀여움 그 자체였다.


아기를 본 순간, 나는 모든 긴장감을 잊고 눈을 반짝이며 간청했다. “우와! 제가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그러자 팔 아팠는데 잘 됐다며, 대빵 치프는 기꺼이 자신의 아기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아기는 순해서 울지도 않았고, 동양인을 처음 보는지 아주 신기해하는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아주 정열적으로 내 손가락을 먹으려 들었다. 치프와 대빵 치프는 그 모습이 웃겼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제 인사 다 했으니 가도 돼, Ju. 옷 망가질라.”


치프가 나를 문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자꾸 내 옷에 페인트가 묻을까 봐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업복을 입고 오는 거였는데….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혼자 떠나기가 좀 미안했다. 그래서 내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오겠다니까, 치프가 고생할 필요 없다며 그냥 가라고 했다. 그래도 내가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동근 얼굴에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한 팀원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이봐 Ju, 나한테 여벌 옷 있어. 그거 빌려줄게. 어차피 작업용으로 가지고 온 거여서 편하게 입어도 돼. 너한텐 좀 많이 크겠지만.”


예쁜 눈에 왠지 모를 고집이 보이는, 분위기가 만만치 않은 그녀의 이름은 릴카(Lilka). 친절한 말 뒤에 왠지 느낌이 좀 쎄했다. 빌려주는 옷을 안 입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주는 옷을 입고 열심히 페인트 칠을 도우며 생각했다. '어디가나 무서운 사람 하나씩은 있다는데, 혹시 저 사람이...?'


하하. 그때는 정말 몰랐다. 그녀와 내가 장차 사내에서 베스트 프렌드가 될 거라는 걸. 아래는 이제부터 이야기에 가장 자주 등장할 사람들이다.


그렇게 직원들과 첫인사를 나누고, 나는 며칠 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희한한 상황이었지만, 계약 조건에 따라 외국 프리랜서로 YV에서 일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법률상으로 문제가 없으려면, 내 존재가 스위스에 있으면 안 됐다. 슬픈 일이다.) 우리의 계획은 이러했다. 우선 지금 취업비자를 받을 수 없으니, 한국에 있는 프리랜서로 석 달 정도를 원거리로 일한다. 그리고 다음 학기가 시작할 때 내가 스위스로 오게 되면, 그때 다시 다른 형식의 취업비자를 알아본다. 풀타임으로 일하는 인턴 비자 말고, 주당 시간제한이 있는 학생 아르바이트 비자로. 어차피 그때가 되면 나도 학교에 다녀야 할 테니 그 조건이 딱 알맞았다.


스타트업의 장점이기도 하겠지만, YV에서 일하면서 가장 신기했던 게 바로 공간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7-8시간의 시차를 극복하고 컴퓨터 한 대로 모든 일을 매끄럽게 처리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프리랜서로 일하는 내내 지구 반대편에 있었지만, 스위스의 회사 사람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Slack’, ‘Whereby’ 등 각종 커뮤니케이션 툴과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인 ‘Trello’의 공로가 컸다. (물론, 나중에 드디어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는 회사 생활이 더욱 즐거워졌다. 그토록 그리던 취업 비자를 결국에는 받아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내가 첫 번째로 맡게 된 디자인 프로젝트, ‘대형 벡터 일러스트레이션 포스터 만들기’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왕초보도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Ai)로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알짜배기 꿀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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