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에 알람이 울렸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부스스 일어났다. ‘늦으면 안 돼.’ 주섬주섬 나갈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서니, 신선한 공기가 코끝에 와 닿았다. 날이 꽤 따뜻하게 풀렸을 때였지만, 아직 해가 뜨기 전에는 쌀쌀했다. 으하함- 하고 하품을 하며 트램을 기다렸다. 치프의 명상 세션에 참여하기로 약속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치프는 동양 사상과 철학, 명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았다. YV 임팩트 투자를 공동 설립하기 전, 큰 금융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중국과 일본 지사에서도 일했었고, 한국에도 놀러 왔었다고 들었다. (내가 홍익대학교 미대에서 공부했다는 걸 알고, ‘거기 클럽 많고 사람 많은 곳 아니야? 그 재밌는 동네 맞지?’라고 물었다. 클럽 하고 사람이 많은 건 맞긴 할 텐데, 재미있는 곳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때도 맨날 밤샘 작업과 과제를 벗 삼아 사느라고, 한 번도 유흥을 즐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2년 간 그 지역에서 살았음에도. 사람 팔자는 만들어 가는 거라는데, 에휴 내 팔자야….)
어쨌든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명상하는 동아리에 나를 초대했다. 모인 사람이 몇 명이던 상관없이, 아침 여섯 시에 명상을 시작한다고 했다. 장소는 (당시 YV 회사가 있었던) 임팩트 허브였다. 내가 머무는 집에서 그쪽까지 가려면 꽤 시간이 걸려서 좀 더 일찍 나와야 했다. 스위스의 교통수단들은 시계처럼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운행되지만, 그렇다고 빠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트램이 오는 게 보였다. 이른 아침에 벌써 하루를 시작하려는 사람 몇을 빼고, 트램은 거의 비어 있었다. 두 칸짜리 의자에 혼자 앉으며 창 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트램은 언제나 같은 구간을 돌면서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사람들을 내려놓지 않는가. 하지만 정작 그 안의 인생들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또 누군가는 병원에 가기 위해,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아니면 반대로 이별을 한 후에 이 트램에 올랐을 것이다. 대중교통 속에서는 모두가 비스름한 군상처럼 보여도 목적지는 제각각 다르다. 결국 아무도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언제나 꿈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 YV에 다니고 싶다는 꿈, 언젠가는 솔로를 탈출해 보고 싶다는 꿈,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차피 한번 살다 갈 인생인데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존재가 싶다는 꿈. 내가 가진 꿈들은 늘 반짝이며 내게 손짓했다. 나는 늘 먹이를 보고 뽈뽈거리며 헤엄치는 금붕어처럼 그걸 향해 냅다 달렸다. 하지만 너무 달리기만 하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그래서 치프가 명상 그룹에 참여해 보라고 제안했을 때 더 관심이 갔다. 마음의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트램에서 내렸다. 몇 걸음 옮기자 보이는 임팩트 허브의 적막한 모습이 낯설었다. 누가 있나, 두리번거리며 앞을 보는데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때 뒤에서 맑은 자전거 벨 소리가 들렸다. “또릉!” 뒤를 돌아보니 치프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그는 능숙하게 자전거에서 내린 후, 옆의 기둥에 그것을 묶어 두었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임팩트 허브의 내부로 들어갔다.
어라? 그런데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하며 십 분 정도 더 기다렸지만, 결국 이번 세션에 참여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인 것 같았다. 옅게 깔린 새벽의 어둠 속에서 치프와 일대 일로 마주 보고(사실 눈은 감고 있어서 보는 것은 아니지만) 명상을 해야 한다니, 이거 왠지 모르게 좀 민망했다. 치프도 좀 난감한지 목청을 큼큼 가다듬더니 일단 불을 켜려고 스탠드를 켰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설상가상으로 전기가 안 들어왔다. 고장인 건가?
“어…. 어차피 명상은 눈 감고 하는 거니까 뭐. 괜찮겠지, Ju? 불편하면 말해.”
그럼요. 저는 이상한 생각 같은 거 안 한답니다. 전혀요. (하하.) 아무튼 그렇게 예상치 못하게 단 둘이서 다소 오붓한 명상 세션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희한한 분위기는 곧 경건한 참선 모드로 바뀌었다. 명상 세션은 치프의 가이딩 메디테이션 (guiding meditation)으로 진행되었다. 이윽고 치프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자, 이제 호흡을 정돈하고, 몸의 감각들에 집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초반에는 치프가 좀 긴장한 듯이 버벅대는 걸 듣는 재미에 빠져서, 명상을 제대로 못했다. 그래도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점차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호흡을 따라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앉아있는 내 몸에서 느껴지는 여러 감각 신호들에 생생히 집중할 수 있었다. 슬슬 저려오는 다리, 숨을 내쉴 때마다 간질간질한 코 끝…. 더불어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 먼 나라에 와서 고생을 하는가’, ‘냉장고가 비었으니 오늘 장을 봐야 하나’, ‘이따가 프레젠테이션 있는데 학장님 얼굴 보기 싫다’ 등.
그런데 그것마저도 지나자, 내 눈가를 비치는 말간 햇살 한 조각의 느낌만이 선명히 남았다. 벌써 동이 터 오고 있었나 보다.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뎅-뎅- 거리며 들렸다. 새들이 푸드덕거리는 소리, 지저귀는 소리. 새벽과는 조금 달라져 있는 따뜻한 바람 냄새. 그러자 내 마음은 마치 집에 온 것 같았다. 스위스의 집도 아니고, 한국에 있는 집도 아닌,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의 집에. 모든 것이 평온하고 만족스러웠다. 지친 나에게, 분명 그 순간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문득 엄마가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주영아, 매 순간마다 생명의 감사함을 느끼며 사는 게 행복한 방법이란다. 우리 딸은 언제 그걸 깨달을 수 있을까?’
그러게요 엄마. 그 말씀이 진리일 텐데. 세상에 같은 사람 하나 없듯이, 같은 날도 두 번 없으니까. 그걸 까먹을 때가 종종 있지만 알아차릴 때마다 감사하게 살아야지.
역시 시간은 상대적인 모양이었다. 한 시간 가량의 명상 세션은 강의실에서의 한 시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후딱 지나가 버렸다. 밝은 아침 햇살 속에서 다시 눈을 뜬 치프와 나는 명상이 어땠는지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곧 회사에서 볼 날을 기대하며 헤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생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서프라이즈로 가득하다. 인터렉션 디자인을 배우겠다고 스위스로 온 내가, 취리히 시내 한복판에서 명상을 하게 될 줄이야. 아무튼 그 놀라운 일들이 우연이 되고 인연이 되어 삶을 이루는 게 아니겠는가. 그게 살아가는 재미일 테고.
임팩트 허브에서 나와서 다시 집으로 향하는 트램에 올랐다. 오후 수업만 있는 날이어서, 아직 학교에 가기엔 너무 일렀다. 올 때 탔던 4번 트램을 방향만 바꿔서 탔다. 그리고 왔을 때처럼, 갈 때도 두 사람이 앉는 칸에 혼자 앉았다. 긴 숨을 내쉬고 다시 창 밖을 응시하며 세상을 바라보았다.
사람들,
나무,
취리히 호수,
바람에 흔들리는 물빛.
트램에서 찍은 사진. 일교차가 심한 탓에 벌써부터 햇살이 쨍쨍인 취리히 호수의 모습.
마치 매 순간마다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세포들처럼 우리 모두가 변화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 목표로 향하는 삶의 여정에 몸을 싣고. 오랜만에 잃어버렸던 미소가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너무 오랫동안 햇살의 따뜻함을 잊고 살았던 것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내 눈 앞에 두고도….
그날 아침, 처음으로 스위스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회사에서 만날 사람들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음 글에서는 YV에서 시작된 새로운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첫 만남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누가 알았겠는가, 처음 만난 사람들과 벽에 페인트 칠을 하며 인사를 나누게 될 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