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수용소에서 인생 여행을(2)

뜻밖에 얻은 행복의 공식

by 이서후

“아니, 그럼 거기 계속 갇혀 있는 거야? 먹을 것도 없이? 그게 뭔 소리야! 당장 공항으로 쳐들어가야겠어! 대빵 치프, 뭐라도 좀 해 봐요!”


“릴카, 진정해. 지금 감정적으로 나서는 건 Ju 한테도 도움이 안 될 거야. 일단 변호사님한테 연락 취해 놨어. 혹시 도울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릴카와 대빵 치프의 목소리. 릴카는 마치 적색경보를 울리는 사람처럼 내 상황을 YV의 사람들에게 알렸다. “기다려 Ju! 언니가 간다!” 릴카는 전화를 끊고 뭔가 작전을 개시한 것 같았다. 데스크 직원인 J. 모히또 씨가 준 조식권으로 눈물 젖은 빵조각을 먹고 있는데, 드디어 영사관에 연락이 닿았다. “여보세요, 민영사입니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니, 얼마나 반갑던지! 내 상황을 들은 영사님은 한숨을 팍팍 쉬셨다. “에휴, 이 놈의 스위스가 또 일을 냈군요. “혹시 비행기 표 값이라도 스위스 공항 쪽에서 내게 할 방법이 없는지 알아볼게요. 잘 버티세요, 학생.” 감사함에 고개 숙여 인사를 했는데, 잠시 후에 전화가 다시 왔다.


“이주영 학생? 아이고, 아까 제가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오늘이 토요일이어서 제가 공항 쪽 관계자하고 연락이 안 닿아요. 사실 어제도 한 건 했는데, 정말 스트레스받네요. 저 영사 일 그만둘까 봐요.” 영사님이 너무 비참해하시길래 일단 그분을 진정시켰다. “아녜요, 저 같은 사람들은 영사님이 계시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든든한데요!”


그 말에 마음이 동하셨던 것일까. 어쩌다 보니 그분과 영사관 직원들의 힘든 라이프 스토리들을 듣게 됐다. 이야기를 한 사발 풀어놓으시던 영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이렇게 알아주시는 분이 있어서 보람이 있는 거겠죠. 얘기해서 그나마 좀 낫네요. 들어줘서 고마워요 학생. 그나저나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일단 힘내요.”


영사님과의 통화가 끝나자, 곧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 Ju! 나야, YV의 변호사 M 씨. 우선 스위스 국민으로서 정말 부끄럽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너무 미안하네. 일단 공항 쪽 하고 연락이 잘 안 되는데, 경찰 쪽에 아는 사람이 있어. 지금 거기 상황은 어때? 그 사람들이 너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고?” 변호사님의 목소리에는 서슬 퍼런 분노가 서려 있었다. “네, 전 괜찮아요. 감사해요, 변호사님….”


한창 정신없이 통화 중인데, 갑자기 내 앞에 처음 보는 경찰관 하나가 나타나서 말했다. “네가 Ju 맞지? 여기 한국 사람은 너밖에 없는데.” 난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 와라. 면회다.”


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엉거주춤 일어나서 그를 따라가니, 그는 공항을 가로질러 나를 데리고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했다. 면세점들을 지나고, 식품점들을 지났다. 그리고 들어간 작은 방에는….


“릴카!”

“아이고, 우리 Ju! 괜찮아?”


나와 통화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릴카가 찾아온 것이다. 그녀 옆에는 커다란 쇼핑백이 서너 개 있었다. 릴카는 내 얼굴을 살피며 속사포로 말을 쏟아놓았다. “일단 먹을 것들이랑 따뜻한 담요 좀 가져왔어. 이것 봐, 호랑이 기운을 받으라고 일부러 호랑이 무늬 담요로 가져왔다고! 저 경찰관 아저씨 있지? 내가 저분 설득하느라고 얼마다 고생을 했다고. 원래는 이렇게 못 만난대. 우리도 아마 오분 밖에 못 만날 거야. 그래도 다행이다. 원래 너한테 수갑 채워야 한다는데…. ”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릴카도 못 본 사이 내가 더 야위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으허엉- 릴카가 최고야!” 나는 측은하게 우리를 지켜보는 경찰관의 앞에서 그녀를 꼭 껴안았다. 감동적인 상봉(?)의 순간을 구경하러 다른 경찰관들이 기웃거렸다. 릴카는 경찰관 앞에서 쇼핑백을 탈탈 털어서 보여주며 이렇게 설명했다.


“자, 이것 봐요. 어디 유해한 것이 하나라도 있나. 냅킨이랑 플라스틱 스푼이랑 포크, 수제 그릭 요거트랑 뮤즐리, 바나나, 샌드위치, 비건 초콜릿, 과일 샐러드…. 맞다! 그리고 이 사과는 심지어 유기농이라고요! 무해하죠? 맞죠? 원래 우리 Ju 자체가 무해한 애라고요!”


경찰관은 자기네도 이 상황이 안타깝다고 했다. “나도 이 공항에서 근무하지만, 여기 규칙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잘 알지. 오분이었던 면회 시간을 십 분으로 늘려 줄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스위스에서 그만하면 엄청난 융통성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했다. 릴카는 나에게 반가운 우연 하나를 말해 주었다.


“맞다! 치프가 마침 태국에서 돌아오고 있거든. 내일이나 모레쯤에 도착할 거래. 국제선을 탔으니까, 네가 머무는 숙소에서 가까운 게이트로 내릴 가능성이 높아. 일단 문자는 보내 놨어. 아마 치프가 그걸 보면 널 만나러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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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카의 구호 물품과 호랑이 기운 담요. 나의 목숨을 구했다.


릴카와의 감동스러운 만남 덕분에, 일용할 양식과 따뜻한 담요까지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직원들과 변호님에게서도 계속 격려의 메시지가 왔다. 그걸 보며 내가 완전히 헛살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정말 감사해서, YV가 있는 쪽으로 절이라도 세 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평온을 되찾자 숙소 앞의 벤치로 나왔다. 탁 트인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그냥 넋 놓고 쳐다봤다. 내가 동분서주할 때도 하늘은 저렇게 평온했던가. 릴카가 주고 간 그릭 요거트를 떠먹는데, 너무 맛있었다. 요거트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던가. 아, 어떡하지.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


그런데 그때, 무엇인가를 들고 내 앞을 총총 지나가던 데스크 직원, J. 모히또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Ju 씨! 아까 B 경관님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지인 분한테 구호 물품 지급받았다면서요? 저도 지금 물품 새로 받고 오는 길이에요. 이제 ‘그것’ 필요하실 때마다 저한테 오시면 돼요!”


그는 바구니에 한가득 들어있는 여성 용품을 보여주며 해맑게 말했다. 아아, 순간 올라오는 부끄러움을 어찌할꼬! 나는 어쩔 줄 몰라 멋쩍게 고맙다고 말하며, 그에게 바나나 한 개를 권했다. 그는 마음은 고맙지만 귀한 물자를 아끼라며 사양했다.


자산 54.png 결국 혼자 먹은 릴카표 유기농 바나나


J. 모히또 씨가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공항이 원래 좀 각박한 곳이지만, 생각보다 재밌기도 해요. 아까 그 B 경감님 있죠? 원래 코미디언 지망생이셨대요. 업무 외의 일에서는 얼마나 웃기는지 몰라요. 그리고 여기 청소하러 오시는 메를린 아주머니도 만나셨다면서요?”


아,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마도? (나는 사람을 보면 자동적으로 인사를 하는 습관이 있어서…. ) 점점 J. 모히또 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이 공항은 스쳐 지나가는 터널 같은 곳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지나가는 장소’가 삶의 터전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마음을 고쳐 먹었다.


‘지금까지 나는 마치 머물러서는 안 될 곳에 있는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어. 이왕 이렇게 된 것, 새로운 관점으로 이 공항 내부을 여행 해 보자. 구석구석 다닐 수는 없겠지만, 내 숙소부터 다시 보기 시작하는 거야.’


3박 4일간의 강제적인 휴가.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며 나만의 여행을 시작했다.




J. 모히또 씨는 임시 숙소에 들어온 지 3년 차가 된 사원이었다. 별의별 손님들의 컴플레인을 들으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특징이 있는 사람이다. (본인은 그것을 ‘직업병’이라고 불렀다.) 그는 하루 이틀이면 떠나는 사람들을 상대하면, 만남과 헤어짐의 덧없음을 깨달을 수 있다고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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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경감님은 정말 코미디언 같았다. 오며 가며 나와 눈이 마주칠 때는 인사를 했는데, 하루는 나한테 휘파람 불며 탭 댄스 추시는 것을 들켰다. 그러자 눈을 찡긋하고는 달아나 버리셨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이송해 오실 때만큼은 영락없는 스위스 경찰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이 곳에서 처음 만난 경찰들의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제복 속에는 다 사람이 들어 있는 법인데, 내가 그걸 잊고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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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쪽에서 오신 청소부 메를린 아주머니는 푸짐한 몸집과 우렁찬 목소리를 자랑하시는 분이었다. 나와 몇 마디를 나누신 후로는 나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았다. 나를 만날 때마다 어디서 구하셨는지, 주머니에 조식권 몇 장을 찔러 넣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거 요긴하게 쓰라고. 고생할수록 잘 먹어야 해.” 내가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 묻자, 이렇게 답하셨다. “여기서 나 같은 청소부한테 살갑게 인사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아가씨가 예뻐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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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람들을 구경하고,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구경하고, (내게 허용된) D구역과 B구역 사이를 오가며 산책을 했다. 새로운 곳으로 향할 기대가 서려있는 사람들의 얼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들의 얼굴.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의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세상에서 울고, 웃고, 항의하고, 무료해하며 공항에 모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도대체 왜 이렇게 나라들을 오가며 여행을 하는 걸까?’


그러자 떠오르는 엄마의 말씀.


“… 다들 결국 행복을 위해 돈도 벌려고 하고, 입시와 취업 지옥도 거치면서 아등바등 사는 것 아니겠니. 그렇다고 늘 기쁘지만은 않을 거야. 그만큼 힘든 점들도 많겠지. 하지만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고,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 결국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서 자기 행복은 자기가 찾아야 하는 거야.”


그럼 저 사람들도 결국 자기 행복을 찾기 위해서 인생의 모험을 하고, 여행을 하는 것일까? 나도 결국 그놈의 행복을 위해 이놈의 스위스에 온 것이고? 사실 생각해보면, 커다랗고 복잡한 스테인드 글라스 같은 이 세상에서 나는 아주 작은 유리 조각일 뿐이다. 난 그저 나만의 빛깔이 가장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내게 가장 행복하고 알맞은 자리를 찾고 싶었던 건데….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탑승구의 풍경이 들어왔다. 뛰어다니는 아이들, 멍하니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공항 관리 직원, 데스크 안내원, 청소부, 경찰, 교대 근무를 하는 정비공, 그리고 여권 심사대의 사람들. 그들은 쉴 새 없이 오가는 출입국자들과 함께 공항이라는 사회적 시스템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 자체가 곧 공항이었고, 이 작은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이었다.


아마 큰 세상도 이와 다를 바 없겠지. 각자의 자리를 찾은 사람들이 만들어 나가는 집합체,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근본일 테니까. 순간, 지금껏 내 심장을 뛰게 한 소설과 영화들의 내용이 무색해짐을 느꼈다. 그것들은 영웅들이 지구를 구하고, 거대 기업 총수의 음모로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지 않은가.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고 명망 높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며,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람들 위에서 떳떳이 입지를 세우는 것이 행복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어쩌면, 그런 이상적인 프레임들은 내 머릿속에 심어진 환상인지도 모른다. 나는 종이와 볼펜을 꺼내 들어 이렇게 적었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고 경제적으로 성공해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성공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혹은 어떤 나라를 무척이나 가슴 설레게 좋아한다면, 그 사람과 그 나라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이다. 무조건 한 식사법을 고집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 식사법이 가져다 줄 건강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환상들의 뒤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만 한다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가장 큰 환상이 숨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우선 행복이 가져다줄 것들에 대한 환상을 깨는 것이 아닐까? 생각 끝에 이렇게 덧붙여 적었다.


행복에 대한 환상을 깨야 만족을 알 수 있다.
만족은 자기 스스로를 인정할 때 찾아온다.
사람은 만족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나 홀로 공항 여행에서 얻은 뜻밖의 공식이었다.


여행의 막바지에 접어들 때 즈음, 치프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를 보러 게이트 D 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눈부신 오후 햇살을 뒤로하며 도착한 그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괜찮아 Ju? 이런 미저러블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거지?”

“괜찮아요, 치프. 이제는 앞으로 힘든 일이 있어도,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마침내 귀국길에 오르는 저녁. 나는 J. 모히또 씨, 메를린 아주머니, B 경감님과 작별하고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그동안 정들었는데…. 아마 공항에 올 때마다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한 행복했던 인생 여행을.


행복해지기로 마음먹은 나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또 이어진다. (어쩜 이렇게 나의 인생은 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응전인 것일까. 마음가짐은 바꿔 먹어도, 역시 사람은 안 변하나 보다.)


다음 글: 22. 프로는 아니지만 프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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