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는 아니지만 프로처럼

직장생활 꿀팁: 내가 키운 프로젝트는 내가 성공시킨다

by 이서후

(*프로처럼 사는 꿀팁 다섯 개는 뒷부분에 나오니 참고하기!)


공항에서 뜻밖의 ‘인생 여행’을 한 후, 다시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집에서 열심히 치킨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들리는 대빵 치프의 목소리. “한국에 잘 도착했어, Ju?” 나는 입을 닦고 말했다. “넵. 스위스행 비행기에서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울었더니, 정말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대빵 치프는 이런 저런 얘기를 묻더니, 갑자기 깜빡이도 켜지 않고 훅-치고 들어오는 질문을 날렸다.


“근데 네가 티셔츠를 그렇게 잘 만든다며?”

“…예?”


이게 뭔 소리인가, 멀뚱멀뚱거리는데 살짝 삐진 듯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치프가 그러던데? 네가 옛날에 자기한테 티셔츠 만들어 준 적 있다고. 나한테 엄청 자랑하던데?”

“아아, 그거요! 재키가 제 사수님일 적에 두 분께 고마운 일이 있어서 선물해드렸던 거였어요. 그때 제작 비용이 부족해서 다른 분들 건 못 만들었고요….”

“흠. 그래?”


대빵 치프의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백 퍼센트 삐진게 분명했다. 치프가 내 선물을 들키고야 말았구나! 여자가 질투를 하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지만, 상사가 질투를 하면 내 앞길은 엄동설한 겨울왕국이 될 텐데. 이렇게 YV에서의 커리어를 렛잇고하는 것인가? 잘 먹던 치킨이 목구멍에 탁 걸리려고 하는데, 대빵 치프가 살짝 으름장을 놓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이번엔 우리 팀한테 다 만들어 주면 되겠네. 아예 새로운 브랜딩 가지고. 내가 사실 비밀리에 팀 브랜딩을 계획 중이거든. 네가 완전히 책임지고, 단체복부터 한번 만들어 봐.”


깜짝 놀라서 '진심이신가요', 하고 물으니까 자기는 한 입 가지고 두 말 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어찌하란 말인가, 나는 지금 한국에 있는데! 제품 확인은 어떻게 하라고? 시차가 8시간인데 패브릭 회사들은 또 어떻게 컨택하라고? 그러자 대빵 치프는 나에게 별일 아니라는듯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런 걸 혼자 해쳐나갈 줄 알아야 프로라고, Ju. 넌 이미 프로잖아.”

“제, 제가요?”

“그럼. 넌 YV 최장수 디자이너야. 레비는 UX쪽이라, 이런 감각적인 일엔 네가 적격이라고. 로날도도 늘상 그런 말을 했지. YV에서 패션을 논하고 싶은 자는 Ju에게 가라고. 마침 네게 딱 맞는 일이 찾아왔는데…. 왜, 설마 겁나는 거야?”


이건 또 무슨 도발이신가. 지금 디자이너로서 내 자존심을 걸고 일을 해보라는 것인가? 좋다. 그렇다면 나도 물러설 수 없지. 챌린지 억셉트! 말은 그렇게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생각해보니 완전히 맨땅에 헤딩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더냐. 포기를 모르는 의지의 한국인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앉아, 치킨으로 윤활유를 칠한 두뇌를 풀가동하여 작전을 수립했다.


‘일단 이렇게 당황스러운 프로젝트가 찾아오면 늘 취하는 방법대로, 러프한 Todo 리스트부터 만들자!’


-디자인 시안 만들고 피드백 받기, 디자인 확정 짓기.
-대빵 치프에게 받은 예산 견적을 토대로 단체복 제작 회사 선정.
-스위스 패브릭 회사들하고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및 가격 흥정
-대빵 치프에게 정보 전달, 컨펌 받아서 제작 들어가기
-스위스 재입국하자마자 업체 방문, 물건 상태 확인 및 컴플레인 있을 시 대처 방안 수립.
-(스위스 특성상) 제작 날짜와 배송 일자가 늘 변동할테니, 상시 확인.


좋다. 일단 리스트가 잡히고 나니 어떻게 일을 해야 할 지 감이 좀 잡혔다. 대빵 치프는 꽤 타이트 한 시간 내에 후드티를 완성해서 가져다 놓으라고 주문했다. (설마 개인적인 감정 때문은 아니었겠지요, 대빵 치프?) 아무튼 급하게 결정된 사안이라 미안하게 됐다는 말은 남겼지만, 난 알고 있었다. 직장에서 듣는 미안하다는 말은 다 거짓부렁이라는 것을! 진짜로 미안했으면 제대로 된 브리핑을 줬던가, 시간이라도 좀 더 줬겠지. 아니 그런가?


'후드티 디자인이라….' 살면서 패션 디자인을 해 본적이 없었기에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지만, 일단 스스로를 믿어보기로 했다. 공항에서도 살아남은 나인데, 고향 땅 한국에서 못할 것이 무엇이랴! 우선 ‘브랜딩 분석 -> 색상과 이미지 선정-> 후드티 디자인 시안 3-4개 완성’의 순서로 도안 작업을 끝냈다. 대빵 치프는 내가 예사롭지 않은 스피드로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역시! 넌 프로야, Ju! 잊지 말라고, 이건 네 프로젝트야! 네가 성공시켜 보라고!’


아…. 진짜 왕부담이야. 그런데 왠지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내가 정말 전문가라도 된 것인양 이상한 책임감이 들기 시작했다. (또 이렇게 조련당하는 것인가?) 내가 선물한 티셔츠가 이렇게 큰 프로젝트가 되어 돌아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YV 최초의 팀 브랜딩 책임자로 임명 되다니.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예쁜 후드티를 디자인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YV 팀이 비춰질 이미지를 생각해야하는 일이었다. 대빵 치프는 철저한 비밀리에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라고 당부했다. 심지어 내 사수님인 레비도 모르게.


대빵 치프는 중간중간 컨펌만 할 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다 나에게 맡겼다. 심지어 이 프로젝트에 드는 비용 분석과 예산 점검까지도 모두. 나는 곧 패브릭 회사들과 인쇄소들을 찾아서 영업을 시작했다. (물론 온라인으로.) 먼저 그들에게 YV를 소개하는 메일을 보내고, 우리 회사와 거래를 튼다면 이런저런 주문들을 할 수 있다는 사항들까지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그래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오퍼를 따지고 분석하여 대빵 치프에게 전달했다. 똑부러지게 일 하려고 정신을 바빡 차렸어야만 했다. 대빵 치프가 계속 이런 말을 툭툭 던졌으니까!


“거봐, 너 혼자도 할 수 있잖아. 이제 완전히 프로 디자이너 맞네, Ju!”


디자이너가 그런 일까지 하는 것이었는가? 내가 생각하는 디자이너의 영역이 분명 많이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대빵 치프가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았기에 모든 책임을 고스란히 졌어야 했지만, 또 그만큼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아져서 즐겁기도 했다. 분량상 생략된 어마무시한 중간 과정을 통하여,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후드티가 완성이 되었다.


아직도 생생하다. 패브릭 회사들과 연락이 되지 않아서 잠 못이루던 날들, 나몰라라하며 빙긋 웃기만 하던 대빵 치프의 얼굴, 탐원들의 옷 사이즈를 (몰래) 알아내느라고 세웠던 작전들…. 정말 한 달 남짓의 기간을 하얗게 불태웠어야 했다. 그런데 더 웃긴 사실은, 그렇게 고군분투해서 만들어 낸 테스트 제품을 입어본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잘 하면 맞을 것 같은데? 머리는 들어 갔어!” 자기한테 꽤나 작은 사이즈인 것을 알면서도 굳이 입어보겠다던 치프. 결국 시착에 성공한 그는, ‘이번에도 Ju가 만든 거 내가 먼저 입었지롱!’ 하며 대빵 치프를 놀렸다고 한다. (출처는 대빵 치프에게 직접 들은 고급정보.)


각잡고 모델 놀이에 빠진 치프. 저 가슴 낑기는 거 어떡해….


YV의 다른 팀원들도 완성된 후드티 디자인을 좋아해줘서 다행이었다. 대빵 치프는 엄청나게 성장한 나의 모습을 본 것 같다며 매우 흡족해했다. 이후 그 디자인은 반팔 및 다른 팀 용품의 용도로도 널리널리 쓰이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전설로 남았다. 아마도 내가 스위스에서 쌓은 수많은 흑역사들 중 몇 안되는 빛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내가 이 프로젝트를 하며 내린 결론. 프로 아닌 내가 프로인 척 일했더니, 어느새 프로로 인정받는 순간이 왔다. 생각해보니 아래의 요 다섯가지 마인드 덕분이었던 것 같다. (이제부터 꿀팁 시작!)




1. 선물은 언제나 옳다.


내 실력을 어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신기하게도 ‘선물’을 하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미처 몰랐다. 내가 순수한 사랑으로 팀원들에게 건넨 디자인 선물 (티셔츠, 크리스마스 카드 등)이, 그들에게 은연 중 내 실력에 대한 이미지를 심어놓았다는 것을. 실제로 “그때 그 애가 이런 걸 잘했는데, 이거 Ju한테 시켜보자!” 라는 식으로 프로젝트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뜻밖의 선의가 나에게 능력을 입증할 기회로 다가오는 순간들이었다. (주의: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는 놀부처럼 처음부터 뭔가를 기대하지는 말자.)



2. ‘Fake it till you make it.’


프로가 아니라면, 프로가 될 때까지 프로인 척 하기. 자신이 없는 일이어도 “저 잘 못하는데….” 이러지 말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음, 일단은 한번 해볼게요.” 하는 거다. 그럼 상대방도 나를 더 신뢰하고 일을 맡긴다. ‘아따 큰일났다’ 라고는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기. 특히 서양에서는 그런 태도를 겸손하다고 생각 하지 않고, 자신감 없어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전문가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전문가처럼 리서치하고, 일하고, 행동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3. 순수한 열정은 가장 강력한 무기.


사람들이 광고를 하는 유튜버에 반감을 가지는 이유가 뭘까? 그들이 만드는 콘텐츠의 목적이 돈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특히 상사가) ’쟤가 승진하고 싶어서 저렇지, 월급 올리고 싶어서 그렇지.’ 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것 중에 제일 깔끔하고 좋은 것이 열정이다. ‘얘는 모든 일에 진심이구나’를 느낄 수 있도록, 회사를 생각하는 오너의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다. 그렇게 큰 그림을 그리면 작은 성공이 따라온다.



4. 프로의 여유로 상황을 대처한다.


물론 일이 틀어지거나, 실수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니까. 하지만 그럴때마다 변명은 금물이다. 깔끔하게 인정하고, ‘아 그랬군요. 이런 부분이 미흡했나봅니다. 이번 기회에 배우고 고쳐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상대방과의 마찰이 적어진다. (대빵 치프처럼) 다혈질인 상사를 두었을 수록, 빠른 인정과 미소는 상황 정리에 도움이 된다는 걸 배웠다. 나까지 정달아 억울하다고 들고 뛰면, 십중 팔구 그런 상사는 뚜껑이 열린 모습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목숨을 위해 조심하자.



5. 내 권리는 확실하게 지킨다


한 없이 너그럽고, 열정있고, 호의적이어도 반드시 명심할 사항이다. 내 권리는 내가 아니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 실제로 내가 많이 겪어본 일이다. 학교에서든, 회사에서든, 내 열정을 남용하고 착취하려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봤다. 심지어 동정심 등 감정에 호소하며 내 어깨에 짐을 올리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일은 일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정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이지만,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비즈니스 마인드를 철저히 가져야 한다. 그 무엇이 되었든 줄 건 확실히 주고, 받을 건 확실히 받아야 진정한 프로다.


이제 다음 글에서는 내가 이런 프로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어떻게 내 일생 일대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겠다. 바야흐로 졸업 프로젝트의 시즌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다음 글: 23. 스위스 사람들을 울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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