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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후 Aug 11. 2021

취리히 호수에서 태어난 첫 문장

선장의 딸, 보리얀과의 만남

"다음 역은 벨뷰(Bellevue)입니다."


2018년 겨울의 끝자락. 트램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소리에 서둘러 내릴 준비를 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늦겨울 아침의 풍경은 한산했다. 여름의 벨뷰는 호수를 찾는 사람들로 늘상 붐비는 곳이지만, 그날엔 그저 물 안개가 자욱하게 낀 풍경 속에 나 혼자 서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혼자 걸으려니까 되게 낯설다. 항상 사람이 많아서 북적거렸는데.'


해가 슬쩍 나오는 듯 하다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안개가 자욱히 낀 커다란 호수, 스멀스멀 올라오는 한기, 저 멀리서 언뜻언뜻 비치는 설산들과 하늘 높이 날아 오르는 갈매기 떼. 그 속에서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몇 분간 가만히 물결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그때 찍은 사진. 아직도 내 핸드폰에 있었다.

"……."


아마도 그때만큼 순간의 흐름 속에서 정적의 소리에 귀 기울였을 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눈에 띄는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수많은 갈매기들 사이에 서 있는 까마귀였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깃털과 반도롬한 부리가 늠름할 정도였다.


다른 갈매기들처럼 부산스럽지도 않고, 한 곳에 가만히 서 있는 걸 보니 오묘한 느낌이 들어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니 까마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엇, 눈 마주쳤다.'


잠시 나를 쳐다보던 까마귀는 몇 걸음을 옮기더니 호수 쪽을 바라보았다. 흰 안개 속에서 더 도드라져 보이는 그 까만 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까마귀는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메아리치는 그 울음 소리를 듣는 찰나에 이런 글귀가 머릿속을 스쳤다.


 “까악!”
  검은 까마귀가 날아오른다. 자욱한 안개 뒤 멀리에 설산의 모습이 보인다.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불안하게 허공을 울리는 거대한 호수. 작은 나룻배들은 이미 모두 돌아갔다.


그와 함께 나의 머릿속에는 순식간에 새로운 세상의 모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눈 앞에서 보는 듯한 생생한 풍경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바로 이런 곳이야! <스크룬하이>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세상의 첫번째 모습!'


벅찬 마음으로 호수를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자, 마치 현실의 풍경을 초월한 것처럼 생생히 떠오르는 장면이 나를 사로잡았다. 거대한 호수 위에 떠 있는 나룻배 한척과 그 위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어느 부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내용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자 그들의 생김새까지도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소녀의 흑갈색 머리칼은 조금 구불거리는 것 같았고, 나이는 열살이 조금 넘어 보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의 아버지는 선장인 듯 했다. 나는 급한대로 핸드폰 메모장에 그들의 대화 내용을 받아 적으며, 소녀의 아버지가 그 아이를 뭐라고 부르는지 귀 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 이름을 듣고, 마치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처럼 마음속으로 나지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보리얀.'


아래는 그렇게 쓰게 된 이야기의 1부 <선장의 딸, 보리얀>의 시작이다.


1장 갈매기 무리 속의 까마귀


  “까악!”

  검은 까마귀가 날아오른다. 자욱한 안개 뒤 멀리에 설산의 모습이 보인다.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불안하게 허공을 울리는 거대한 호수. 작은 나룻배들은 이미 모두 돌아갔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오직 대여섯 명이 탈 수 있을 법한 배 한 척뿐이다. 쥐 죽은 듯 고요히 떠 있는 배 안에 열 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소녀와 건장한 선장이 타고 있다. 뱃머리 아래에서 넘실거리는 짙푸른 물결이 찰싹대는 소리를 낸다. 하늘 위를 빙빙 도는 검은 새를 바라보며, 소녀가 나지막이 침묵을 깬다.

  “아빠, 까마귀는 벌을 받은 새라면서요?”

  소녀는 어딘가 언짢아 보인다. 그물을 정리하던 선장이 손을 멈추더니 소녀를 돌아본다. 축축한 바람에 젖어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자신의 것과 똑같은 색이다.

  “···우리 딸을 또 누가 놀렸구나?”

  선장이 한숨을 쉬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자, 소녀는 입술을 조금 깨물며 대답한다.

  “자꾸 나보고 까마귀라잖아요, 깍깍 울어보라고.”

  “그건 네가 달라서 그런 거야. 하지만 아빠가 늘 뭐라 그랬지?”

  “다른 게 틀린 건 아니라고요.”

  “그렇지. 그런데 까마귀가 왜 벌을 받은 새라니?”

  소녀는 설산 너머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한다.

  “여기 사는 새들 중에서 까마귀가 어둠의 뿌리인 마라트의 꼬임에 넘어간 첩자래요.”

  “마라트?”

  선장이 조금 놀란 듯 묻자,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네, 먼 대양 ‘샤’에서 괴물들을 만들어내는 마라트요. 자기네는 갈매기처럼 고귀한 에실린이라 은빛 머리에다가 선함을 타고났는데, 나는 머리카락도 새카만 것이 태생부터 글러 먹었대요.”  

  선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이런, 이런. 보리얀, 그런 터무니없는 말에 기분 상하지 말려무나. 어떤 사람은 창백한 피부와 은색 머릿결을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짙은 색 살결에 어두운 갈색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뿐이야. 뭐가 더 좋다고 어찌 얘기할 수 있겠니? 그건 마치 백합이 하얗기 때문에 빨간 장미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라고 하는 것과 같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고 까마귀들은 현명한 새란다. 진주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길잡이인걸.”

  “까마귀가 호수 속에 진주가 있는 곳을 안다고요?”

  “그럼. 까마귀들이 빙빙 날아오르는 곳 아래에서는 늘 진주를 구하기가 훨씬 쉽단다. 하지만 마라트가 보내는 괴물들을 피해 진주를 건져 올리려면, 재빠른 갈매기들처럼 눈치껏 행동해야 하지.”

  “그렇다면 까마귀들도 갈매기처럼 우리를 도와주는 새에요? 마라트의 첩자가 아니고요?”

  “당연하지. 갈매기는 무리 지어 진주를 구하고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따르는 새야. 그리고 까마귀는 진정한 보물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현명한 새란다.”

  선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잇는다.

  “가장 중요한 건 갈매기도, 까마귀도, 백조도, 오리도 모두 서로를 헐뜯지 말고 응원해야 한다는 거야. 특히 지금 같은 어둠의 시기에는 더더욱 말이지.”

  “···아빠, 마라트가 정말 우리를 다 집어삼킬 때가 올까요?”


그날, 호수에서 돌아온 나는 계속 보리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있는 서쪽 호수 '자일리아샤'의 풍경, 그리고 그곳의 동물과 식물들의 모습을 두루 살펴보며 글과 스케치로 옮겼다. 마치 이야기 속의 여행자가 된 것처럼 그 세세한 모습들을 담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그런 직업이 있다면, 나는 이야기 여행자가 되고 싶구만. 에휴, 근데 그렇게 될 날이 오겠어? 설마.'


코로나도 없던 그 시절, 나는 훗날 '이야기 여행자'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 난 취리히 임팩트 허브에서 인턴쉽을 찾고 있는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보지 않는다' 02화 참조) 그런데 정말로 설마가 이렇게 사람을 잡을 줄이야. 


여담이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덥고 지쳐서 어딘가로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우리, 다음 글에서는 내가 이야기 여행자로서 본 아름다운 서쪽 호수의 마을로 함께 여행을 떠나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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