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후 Aug 18. 2021

타인의 말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

누군가 내 마음의 울타리를 침범한다면

지금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온다. 이따금씩 천둥도 울린다.


창 밖을 보고 있자니 문득 여름의 스위스가 떠오른다. 그곳은 참 비 소식이 잦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를 향해 툭툭 던져졌던 말들 때문에.


"Ju, 이번 프로젝트 네가 알아서 할 거지? 넌 동양인이라 일하는 거 좋아하잖아."

"동양 애들은 원래 다 고분고분하고 유럽 사람들 좋아한다던데, 넌 너무 딱딱해."


어디서나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들이 한 명씩은 있기 마련인데, 스위스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한 동기는 내가 못마땅한지 늘상 시비를 걸었다. 치사하게 인종이나 국적을 가지고 그러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런데 그런 우울한 상황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동급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한국에서도 만만치 않게 봐 왔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제각기 다를 수 있어도, 서로를 괴롭히며 방황하는 덜 자란 아이들의 모습이 스위스에 있는 대학에서도 보였다. 


보이는 폭력에 상처 받고 보이지 않는 폭력에 시달리는 것에 지친 사람들. 무관심하게 지나치면 모를 수도 있는 그런 사람들. 스위스에 홀로 떨어져 있을 때, 나는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들이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도 상처를 주는지 더 세세하게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절에 나는 이런 일기의 한 구절을 남겼다.  


괜찮고 싶은데 괜찮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자꾸만 그들의 말이 내 마음의 영역을 넘어온다. 꾹꾹 눌러오는 눈물이 터질 것 같다. 이런 감정적인 침략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고 싶다.


그리고 그 일기장 속의 경험은 훗날 <스크룬하이>에서 차별받고 따돌림당하는 보리얀의 유일한 친구, 아파라티 할아버지가 해주는 말에 담기게 되었다.


아파라티 할아버지의 모습


  (보리얀이 아파라티 할아버지네 정원에서 동물들을 만나는 장면 중)


  “울타리는 표식이야. 크게 떠벌리고 다니지 않아도, 이곳이 누군가의 영역이라고 보여주는 거지. 목장들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저마다 울타리가 있어. 그렇지 않니? 그 울타리를 무시하고 함부로 남의 영역에 들어갈 때 약탈이 일어나는 거란다. 그게 바로 고통의 시작인 게야. 눈에 보이는 약탈은 남의 재산을 훔치는 거고, 보이지 않는 약탈은 자유를 훔치는 거지.”

  “자유를 훔친다고요?”

  “그래. 생각의 자유와 감정의 자유 말이다. 네 또래 아이들이 너를 괴롭힐 때도, 그 못난 애들이 자기 멋대로 네 마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서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겠니. 너는 보리얀으로 태어났어.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자유가 있지. 하지만 그 애들이 널 뭐라고 부르지?”

  “까마귀요.”

  “허허, 그놈의 까마귀. 그 애들이 네 마음속에 쳐들어와서 ‘보리얀’을 훔쳐 가고 까마귀를 데려다 놓는 게야. 그럼 어떤 기분이 드니?”

  “아주 나쁜 기분이요. 까마귀 울음소리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나요. 마치 평생 그렇게 저주받고 살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렇겠구나. 하지만 까마귀가 저주를 받았는지, 어땠는지 그 애들이 보았다니? 무슨 근거로 그렇게 믿는다니? 그리고 너는 엄연히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진 아이인데 어딜 봐서 새처럼 생겼다니? 기껏 해 봐야 머리색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걸 텐데, 생긴 모습으로만 보면 오히려 날개가 있는 갈매기가 까마귀와 더 닮았겠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네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암, 헛소리이고 말고. 하지만 아직도 까마귀의 ‘까’자만 들으면 기분이 나쁘지?”

  “···네.”

  “그게 바로 그 못난 것들이 네 생각과 감정의 자유를 훔쳐 간 거란다, 보리얀.”

  “······.”

  보리얀은 잠시 묵묵히 있더니 묻는다.

  “···그럼 제가 그걸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아파라티 할아버지가 보리얀을 보고 쉽다는 듯 말한다.

  “아주 간단해. 네 울타리 안에서 보리얀인 양 행세를 하는 까마귀를 날려 보내고, 다시 네가 그 안으로 들어오면 되지.”

  “제가 다시 들어온다고요?”

  “그래. 누군가는 자꾸 네 울타리를 넘어오려고 하겠지. 계속 네 자리에 까마귀를 넣어 놓고 싶어서 안달이 날 거야. 하지만 네가 진득하게 마음을 지키고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잊지 않으면, 그 누구도 너를 해칠 수 없단다. 그래서 나중에는 까마귀던, 까막눈이던 그 어떤 소리를 듣더라도 네 울타리 안을 지킬 수 있을 거야. 알겠니?” 

  보리얀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근데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아파라티 할아버지가 빙긋 웃으며 이렇게 묻는다. 

  “그래, 그것 참 좋은 질문이구나. 네 생각에 너는 어떤 아이니?”

  곰곰이 생각한 끝에 보리얀이 입을 연다.

  “음, 저는 아빠를 따라서 배를 타고 진주를 모으는 걸 좋아해요. 드넓은 호수가 하나도 무섭지 않거든요. 나중에 커서는 아빠처럼 커다란 배의 선장이 될 거예요. 그리고···.”

  보리얀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헤사티오 열매랑 엄마가 만들어준 프릿을 가장 좋아해요. 또, 엄마께서 저녁 시간에 책 읽어주는 것도 정말 좋아요. 하지만 어떤 책인지는 말할 수 없어요. 비밀이거든요.” 

  “오, 아주 훌륭하구나. 그럼 그렇게 용감하고 똑똑한 아이의 이름은 뭐지?”

  “저요? 보리얀이죠.”

  “그래, 그럼 보리얀은 그런 소녀로구나.”

  보리얀이 아파라티 할아버지를 보고 빙그레 웃는다. 

  “맞아요, 할아버지.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나는 어떤 사람일까? 지금 나를 괴롭히며, 마음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꼭 타인의 말에서가 아니더라도, 비관적인 생각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내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며 나무라고 다그칠 때가 종종 있으니 말이다. 


아파라티 할아버지의 질문대로, 내가 누군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그럼 더 선명하게 보일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가졌던 기대가 정말 내가 원해서 가졌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세상의 기대에 나를 맞추려 것이었는지.


마음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가 나에게 솔직해지기 시작하면 신기하게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는 행운도 찾아오는 것 같다. 믿기 힘들지만 외톨이였던 보리얀에게도 드디어 새로운 또래 친구가 생기게 되는 날이 왔다는데, 그 아이는 누구일까? 


보리얀의 친구가 된 것을 보면 만만치 않게 독특한 아이일 듯한데, 다음 글에서는 그 친구가 누군지 한번 만나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쪽 호수로 떠나는 짧은 휴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