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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후 Aug 25. 2021

서로의 마음을 여는 방법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소리

"이걸 쓰고 눈을 감으라고?"

"응. 그리고 편안하게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돼."


때는 2020년 3월 초. 아직 코로나가 들이닥치기 전 스위스에 있을 때였다. 나는 'Portraits of Life'라는 졸업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기에 한창 바빴다. 사람들을 심층 인터뷰하고 그들의 삶에 대해 들은 다음, 그것을 나레이션과 그림, 음악이 들어있는 영상으로 제작하는 일을 혼자 하고 있었기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보지 않는다> 24화 참조)


그날은 내가 다니던 직장의 동료 중 한 명이었던  E를 인터뷰하는 날이었다. E는 나와 동갑이었는데, 우린 서로 인사만 할 뿐 별로 말을 섞고 지내지 않던 사이였다. 투자 전략 담당에 있던 E와 디자인 팀에 있었던 나는 아무래도 엮일 일이 없었다.


E는 항상 칼퇴근을 했고, 나는 언제나 끝까지 남아서 일했다. E는 분석적이고 조금 차가웠으며, 나는 열정적이고 다정다감한 편이었다. 심지어 성별까지 달랐던 우리는 도무지 친해질 수 없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에게 내 프로젝트에 참여해 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을 때에도 난 별로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조금 놀랐다. 사실 다른 사람들을 인터뷰 대상으로 모집하며 E에게도 예의상 물어봤던 것이라 더 그랬다. 좀처럼 직장 사람들과 사적인 장소에서 어울리는 걸 즐기지 않았던 E였기에, 나는 이 프로젝트가 개인적인 삶의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걸 충분히 말해 주었다.


"알았어, Ju. 용기 내 볼게."


반쯤 웃으며 대답하던 E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내 질문들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솔직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환경과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던 상처들까지도. 그제야 나는 왜 그가 지금껏 칼퇴근을 해야만 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두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인터뷰가 마무리되었을 때, 나는 눈물이 조금 고인 눈으로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E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씩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실 네가 나보고 인터뷰하지 않겠냐고 물어봐줘서 기뻤어.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말하는 걸 듣고, 나도 참여해보고 싶었거든."


그랬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사실 인터뷰가 잘 진행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는데. 나를 믿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들려준 E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얘기 들려줘서 고마워. 네가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거든."

"내가 더 고맙지. 내 얘기에 그렇게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그의 말을 들으며 마음속에 큰 울림이 전해졌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너무 바쁜 세상에 살았던 나머지, 좋은 친구를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니. 나의 졸업 프로젝트가 준 뜻밖의 선물은 바로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그 덕분에 나와 E는 둘 다 직장을 떠났음에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서로 이따금씩 손으로 쓴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될 만큼.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첫 번째 방법은 바로 그거란다, 얘야. 들어주는 것 말이다.”

- <스크룬하이>, 아파라티 할아버지의 말씀 중에서


<스크룬하이>의 이야기 속에서 보리얀과 루딘도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며 진정한 친구가 되어간다. 루딘이 자신의 아버지 스루딘 선장에게 혼나고 집에 돌아오지 않던 어느 날, 보리얀은 쾌활한 사고뭉치인 줄만 알았던 루딘이 가져왔던 슬픔의 무게를 알게 된다. 비밀 아지트에서 루딘을 찾은 보리얀은 일단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루딘을 책망하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본문 중)


  “근데…. 그런 얘기는 나한테도 좀 해 주지 그랬어. 친구인데.”

  루딘은 보리얀을 마주 보며 살짝 미소 짓는다. 그리고 잠시 고민한다. 그 얘기를 할까, 말까.

  “······.”

  루딘을 바라보는 보리얀의 눈빛이 진지하다. 순간, 아파라티 할아버지의 말씀이 루딘의 머릿속에 스친다. 상대방이 진지하게 들어줄 때, 자신도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했는데. 혹은 그 반대였던가? 잠시 보리얀을 바라보는 루딘이 천천히 말한다.

  “…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괴짜라 남쪽 마을에서도 별로 친구가 없었어. 근데 여기 오니까 나보다 더 희한한 애가 있지 뭐야. 근데 그 애가 또 자일리아샤에서 최고로 멋진 바얀 선장님의 딸인 거야. 장난치면서 놀리는 것도 재밌고, 같이 다니는 건 더 재밌고. 너랑 있으면 시간이 엄청 금방 가거든. 그러니까 슬픈 얘기는 안 하고 싶었어. 너한테는.”

  타닥타닥 거리며 모닥불이 밝게 타들어 간다. 보리얀은 작게 중얼거린다.

  “진짜 친구는 다 같이 하는 거지. 재밌는 것도, 슬픈 것도.”

  루딘이 아무 말없이 보리얀을 쳐다보자, 보리얀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난 걱정했단 말이야. 혹시 내가 알려준 이 계곡에서, 네가 어떻게 된 건 아닌가 하고. 그래서 아까도 널 보자마자 허겁지겁 끌고 나온 거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보리얀이 고개를 내젓자, 루딘이 살짝 장난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왜? 내가 없으면 슬플 것 같아?”

  보리얀은 빙글거리며 웃는 루딘의 얼굴을 흘겨본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쏘아붙인다.

  “그럼 슬프지, 안 슬퍼? 넌 내가 막 사라지면 안 슬플 것 같냐?”

  “······.”

  루딘은 잠시 보리얀을 쳐다본다. 그리고 짓궂게 보리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그러지 마라. 너 없으면 재미없어.”

  그러자 보리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으휴, 그런 꼴 안 보고 싶으면 얼른 집에나 가자. 엄마 아빠한테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단 말이야.”

  “알았어. 하여튼 너도 약속은 참 잘 지켜. 그치?”

  괜히 궁시렁거리는 루딘에게, 이번에는 보리얀이 손을 내민다. 루딘은 잠시 그 손을 쳐다본다. 까무잡잡하면서도 작고 야무진 손. 보리얀이 루딘을 보며 채근 댄다.

  “이제 얼른 일어나. 집에 가서 스루딘 선장님한테 아무 일 없었다고 말씀드리자. 응? 그래야 내일도 같이 놀 거 아냐. 나도 너 없으면 심심하다고.”

  루딘은 이내 보리얀이 내민 손을 잡는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선다. 보리얀의 얼굴에 퍼지는 미소가 그의 얼굴에까지 번진다. 그 순간, 루딘은 생각한다.


  이 친구의 손을 오래도록 잡고 싶다고.

  어쩌면 평생.


  모닥불이 꺼진 자리에서는 푸근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저녁 별들이 총총히 뜨기 시작한 하늘 아래, 나란히 걸어가는 보리얀과 루딘의 뒷모습이 보인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집이 있는 곳을 향해.




다음 글에서는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할 때쯤 전 세계에 몰아친 폭풍에 대해 써 볼까 한다. 그 폭풍의 이름은 코로나 바이러스. 그와 함께 본격적으로 <스크룬하이>의 이야기를 써 나가며 현실세계에서 부딪혔던 일들에 대한 에피소드가 시작되는데···.

(다시 생각만 해도 아찔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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