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편파적인 단어, '중립'

by 서휘

내가 정식 조사를 요청함에 따라 회사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담당자는 공정한 절차를 거쳐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람들로 위원을 구성했다고 나에게 통보했지만, 나는 위원들이 우리 부서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담당자는 사건과 관련된 모든 조사관들이 이 사태에 대해 중립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취하도록 감독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의도와는 달리 조사관들은 중립적이긴커녕 피해자를 압박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담당자에게 '회사가 공정하게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증거, 즉 규정이나 지침 같은 공문서를 메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알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요청한 문서를 보내줄 수 없으며 원칙에 공정하게 진행하고 있다', '진행 과정에 불만이 있거나 의심이 든다면 회사의 처리 방식이 틀렸다는 증거를 직접 찾아 제출하라'는 말로 입증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겼다.


더불어 '회사는 신고인이 원하는 형태로 정보를 줄 의무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은 법적으로 문제 되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의무만 다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담당자에게 잘못이 없는 건 안다. 그도 상부의 지시를 받아 시킨 대로 일을 처리하는 직원에 불과하겠지.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한다든지, 한쪽 편을 드는 뉘앙스를 흘릴 순 없었겠지. 만약 그랬다면 더 신뢰하기 힘들었을 거다.


문제는 어떤 규정을 기준으로 조사를 진행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회사가 틀렸다'는 증거를 찾긴 무리란 거였다. 신내림이라도 받아 어떻게든 증거를 내민다 해도 월권이라며 내 주장 따위 무시해 버릴 게 뻔했다.




담당자는 진상조사위원회의 위원들에게 제출할 요청서를 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요청서라 해서 거창한 내용이 들어갈 필요는 없고, 하고 싶은 말을 적으라 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1. 2차 피해 방지 강화와 피해자 보호조치 시행: 이번 사건을 조사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신고인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보호조치를 강구해 달라.

2. 피해자의 정신적 피해 고려: 피신고인들의 주장이나 의도와 관계없이 나에게 가해진 행위들은 오해나 갈등, 편법 수준이 아닌 명백한 불법행위이며 그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사건 자체와 피해자의 현재 상황을 고려해 신속하고 철저하게 조사해 달라.

3. 엄중하고 공정한 징계: 부당하거나 소극적인 방법으로 절차를 진행하지 말아 달라.

4. 조사 결과 열람 요청: 사건 처리에 어떤 규정과 법이 적용되었는지 투명하게 공개해 달라.


"사건이 불필요하게 장기화되어 모든 관계자들이 더 큰 상처를 입는 상황은 원하지 않는다."




위원들은 가해자들에게 딴지를 잡히지 않으려면 소명의 기회를 줘야 한다며 며칠 동안이나 그들끼리 입을 맞출 시간을 줬다. 회사 입장에서는 '입 맞출 시간'이라는 표현이 거북하고 불편하겠지. 그러나 집단과 싸우는 개인, 그것도 힘없는 계약직 직원은 그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1초 만에 시나리오를 써낼 수 있었다.


떨리는 한숨, 한숨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그때- 위원 중 한 사람이 대놓고 다리를 꼬았다. 중대한 집안일이라도 생겼는지 주야장천 휴대폰만 보며 무성의한 자세를 취했다. 내가 "위원님, 제 말 듣고 계신가요?"라고 대놓고 묻자 그는 "네, 듣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하세요."라 하곤 끝까지 꼰 다리를 풀지 않았다.


피해 사실과 관련해 구체적인 나의 입장을 듣고자 부른 거라 했다. 그간의 일들, 나의 대처, 느꼈던 심정을 묻고 난 후 더 하고 싶은 말을 하라길래 미리 적어두었던 글을 읽었다.


반드시 피신고인들에게 소명권을 부여해야만 절차상 이의제기를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이 절차가 명분상 왜 필요한지, 회사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 정도는 짐작한다. 중요한 건, 한 달 전 마무리된 인사과 조사에서 피신고인들의 가해 행위가 모두 인정되었다는 거다.


1차 판결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죄수가 2차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을 게 뻔한, 그런 상황이었다.




조사실을 나오며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사직서를 제출했다.


퇴직 사유는 '직장 내 괴롭힘과 2차 피해로 인한 계약 연장 거부'였다.

이전 04화내가 갑자기 죽으면 무조건 타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