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동안 모래알처럼 까끌거리는 밥알을 씹으며 버티다 휴직을 요청했다. 무턱대고 "저 힘들어요, 쉬게 해 주세요" 하고 떼를 쓴 것도, 안 될 일을 억지로 되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공간 분리니 업무 조율이니 하는 기존의 피해자 보호조치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몇 번이고 설명했다. 하지만 회사는 '이런 상황에서의 휴직은 선례가 없으니 불가능하다'며 내 요청을 거절했다.
이러다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고 영 나쁜 마음을 먹게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결국 대표에게 직접 메일을 보냈다. 정신과에서 그간의 일을 말할 때처럼, 또 한 번 구역질이 날 만큼 괴로울 게 뻔해도 실낱 같은 희망 한 가닥도 없이 너덜너덜해진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다.
그제야 회사는 나에게 '얼마나 힘든지 증명해 보라'고 했다. 휴직을 처음 요청할 때부터 내가 먼저 필요한 서류가 있으면 제출하겠다고 했는데, 그 서류가 있는지조차 묻지 않던 그들이었다. 혹시라도 내 유서에 자기 이름이 적히거나 SNS에 폭로라도 될까 걱정됐던 건가.
나는 정신과 진료 기록과 임상심리검사를 바탕으로 한 진단서를 제출했다. 병명은 중증도 우울 에피소드와 적응장애. 사흘쯤 지나 드디어 계약 만료일까지의 병가를 통보받았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계획된 업무 반나절만에 정리해야 했고, 동료에게 인수인계할 겨를도 없었다.
진단서를 제출하고 받은 병가라 완전한 피해자 보호조치라고 보긴 어렵다. 그래도 이 회사의 직장 내 괴롭힘 사건에서 피해자가 휴직을 얻어 낸 첫 사례를 만들어냈다는 점에 의미를 뒀다. 만에 하나 피해자가 또 생기더라도 '선례가 없어서 휴가를 줄 수 없다'는 거지 같은 말은 안 들어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었다.
Q1. 부서 이동은 왜 고려하지 않았는가?
A1.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다. 신고 당일, 원하는 조치가 있냐는 관계자의 물음에 "업무 마무리가 우선이 부서 이동은 최후의 수단으로 미루겠다"고 답했다. 업무 마무리는 안중에도 없을 만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잠시나마 부서 이동을 신청할까 고민했으나 이런 이유들이 발목을 잡았다.
첫째, 어떤 직원이든 부서 이동할 시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전 직원에게 공표됐다. 그럴 바에는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둘째, 건강이 너무 악화됐다. 회사 앞에만 가도, 비슷한 건물만 봐도 과호흡이 왔다. "오늘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정신이 하루하루 피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부서에서 일하느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출근 자체가 버거운데 부서 이동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
셋째, 휴가를 요청했을 때는 각 부서의 큰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시기였다. 부서를 이동한다 해도 해당 부서의 업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일해야 했을뿐더러, 모두가 정신없는 와중에 인수인계를 받기 사실상 불가능했다.
Q2. 괴롭힘 신고 후 예상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 위험에 대해 가볍게 생각한 건 아닌가?
A2. 그럴 리가. 과할 정도로 조심했다면 모를까, 절대 가볍게 생각한 적은 없다. 피해자로서 어떻게든 추가 피해를 막고 싶은 마음이었다. 믿을 구석 하나 없이 맨땅에 헤딩한 건 내 선택이었다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사람이라면 이런 짓은 안 하겠지"의 '이런 짓'을 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건 규모에 비해 나의 대응이 얼마나 신사적이었는지, 괴롭힘이 멈추기만 바란다던 내 바람이 얼마나 순진하 소극적이었는지 돌아보게 됐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앞으로 이 직종은 거들떠보지도 않겠구나 싶다. 안 그런 데가 어디 있겠냐마는, 업계가 워낙 좁다 보니 불이익을 피하긴 어렵다. 더럽고 치사해도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차고 넘친다. 전 직장에 연락해 나에 대해 물어보다 해도 내가 알 길은 없으니 말이다.
가장 청렴해야 할 조직이 부정청탁과 비리로 찌들어 있고, 가장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품위를 앞다투어 떨어뜨리고 있다.
참, 명예훼손과 모욕으로 피소당한 건은 기각되었다. 기각되기까지 약 2주 걸렸고, 그동안 반 시체처럼 지내며 강제 다이어트를 해야 했다.
참고로 소송이나 민/형사상 문제가 아닌 사내 분쟁 같은 작은 건도 증거 싸움이다. 반드시 카톡 캡처본 녹음파일, 동료의 증언 등의 증거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해 두는 게 좋다. 현장에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빠른 시일 내에 가해자에게 유도질문을 던져 스스로 가해 사실을 말하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