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미터가 넘는 골리앗을 쓰러뜨리지 못해 이스라엘 군사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양치기 소년 다윗이 조약돌을 쥐고 나타났다. 사울 왕이 하사한 갑옷도 흘러내릴 만큼 호리호리한 소년이 기세등등하게 나타난 걸 보고 블레셋 군사들은 물론, 같은 편인 이스라엘 군사들도 하찮다며 이마를 짚었단다.
그 소년이 골리앗의 이마 한가운데를 명중시켜 두개골을 박살 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누가 뭐래도 다윗 본인은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을 거란 확신에 차 있었을 거다.
어린 다윗은 어떤 보호 장비도 갖추지 않았다. 갑옷과 투구를 입고 가라는 사울의 제안에도 고작 돌멩이 몇 개만 주머니에 넣었다. 나도 그렇게 해보기로 했다. 뭐, 누구와 달리 보호 장비가 없어 '못' 입은 거지만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는 싸움의 방식도 달라야 했다.
모두 내게 '안전한 틀' 안에서 싸우라고 했다. 그러나 애초에 내가 그 틀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던 걸. 보호 장비를 챙겨 줄 사람은 무슨 나를 따라다니며 돌을 손에 쥐어 줄 사람도, 망을 봐줄 사람도 없었다.
내가 그 다윗이 되기로 결심했다. 아무것도 없던 두 손에 돌멩이를 딱 세 개만 쥐어보자 생각했다.
첫 번째 돌멩이는 노동부, 두세 번째 돌멩이는 관련 국가기관이었다. 회사가 자체적으로 사건을 조사하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릴 게 뻔했다. 또 내가 엎지른 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는 애송이 취급 당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이에 대해 아예 다른 한 편의 글로 다루려 했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하게 됐다. 모든 기관에서 돌아온 답이 '조치하겠다', '감독하겠다'가 다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조치할 건지는 알려줘야 숨 쉴 구멍이라도 생길 텐데. 나에 대한 소문을 매 초마다 퍼뜨리고 비밀유지는 신경도 안 쓰는 가해자들의 개인정보를 국가가 나서서 지켜주겠단다.
'국가가 보호하겠다'는 말에서는 때때로 '누구를' 보호하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딱 한 번, 노동부에서 내가 접수한 민원에 대한 진술을 요구해 다녀왔다. 담당 근로감독관은 이 이유로 당시의 휴직 조치는 피해자 보호조치가 아니라고 했다.
1. 신고인이 타당한 이유로 수차례 휴직을 요구했음에도 수락하지 않다가 계약 만료일로부터 한 달도 안 되는 시점에 통보함: 신고인(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조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 위배
2. 특별휴가가 아닌 병가는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아니었어도 진단서를 제출해 인정받을 수 있었음: 피해자 보호조치가 아니라 건강상의 이유로 휴직한 것
이후 특별한 회신은 없었다. 대부분의 대응은 시간 끌기와 무책임한 회피로 점철됐다. 현실적으로 국가가 힘없는 피해자를 구제할 역량이 없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노동부는 징계위원회를 실제로 개최했는지, 경중에 상관없이 실제로 징계를 처분했는지 유무만 본다고 한다. 단순 경고든, 정직이든, 해임이든 징계 수위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 없단다. 징계 결과와 그 근거를 공개하는 것도 모두 회사의 재량이라는 답만 돌아왔다.
여기서 내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정보공개포털이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이 포털에 정보공개청구 글을 올리면, 공공기관은 이를 접수한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공개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 10일 범위 내에서 연장할 수 있다.) 정보 공개를 노동부에 요청해도 자세한 답변을 줄 수 있는 건 회사 측이라며 노동부가 답변 기관을 회사로 이관했다.
내가 올린 청구 내용을 공개 가능한 범위까지 요약했다.
(회사명)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징계 정보 공개를 요청합니다. 제공받고자 하는 정보는 가해자에 대한 징계 처분 결과와 그 근거입니다.
요청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과한 법률 제9조(비공개 대상 정보), 제11조(정보공개 여부의 결정)
- 근로기준법 제76조의3(직장 내 괴롭힘 발생 시 조치)
- 개인정보보호법 제18조의2(개인정보의 목적 외 이용 및 제공 제한)
1.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 제1항의 6에 따르면 '개인에 관한 정보로서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비공개가 원칙입니다. 그러나 '공공기관이 작성하거나 취득한 정보로서 공개하는 것이 공익이나 개인의 권리 구제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정보'는 비공개 정보에서 제외됩니다.
이 요청은 개인의 호기심이 아니라 사건의 진실 규명과 피해 회복, 그리고 재발 방지 차원에서 공익적 필요성이 명백히 인정되는 사안에 대한 것입니다. 당사자의 요청에도 공개하지 않는다면 피해자의 알 권리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회사가 해당 사건에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더욱 키울 수밖에 없으며, 사건 처리 절차의 적절성과 실효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2. 징계 처분은 행정절차법 제21조 제1항에 따라 그 사유와 근거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하며, 그에 따라 정당한 사유와 근거 없이 징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해당 내용을 공식 문서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위 요청에 대해 정당한 사유 없이 비공개 결정을 내릴 경우 정보공개법 제18조에 따른 이의신청 및 행정심판 청구는 물론이고 국민권익위원회, 국가위원회, 청렴포털 등에 민원을 제기할 예정입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회사에서 답변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