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듯 지지 않은, 포기한 듯 포기하지 않은

by 서휘

징계의결서 공개 요청에 대한 회사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귀하의 청구와 관련해 내부 정보공개심의회를 개최했습니다. 징계대상자의 인사 프로필이나 징계 사유는 민감한 개인정보이자 회사 기밀로 분류되며, 사생활 보호와 인권 침해 우려가 있으므로 징계 대상자 중 공개 동의 의사를 밝힌 사람의 정보만 제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징계의결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신고 내용 중 모든 비위는 사실로 인정되었으나, 그 경중이 약하고 경과실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사되어 다음과 같이 의결한다."


그런 경험 한 번쯤 있지 않나. 앓던 이 빠지듯 시원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뭔가 모호하고 기분 나쁜, 잇몸까지 염증이 번진 듯한 느낌을 받은 경험.


가장 피하고 싶은 결과였다. 징계 수준은 솜방망이- 아니, 솜방망이를 보여만 준 수준이었다.


회사가 줄 수 있는 가장 낮은 처분, '경고'.


아예 징계를 피해 간 직원도 있었다. 모든 비위가 사실로 인정되었다면서도 그 책임을 이토록 가볍게 넘긴다니.


지지 않았지만 진 듯한 이 싸움. 무엇을 위해 고군분투했는지 모를, 만신창이가 된 몸과 정신만 남은 싸움. 회사가 말한 비공개 사유는 정말 가해자들의 인권과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솜방망이 처분을 내리고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감투일까.


사건이 흐지부지 마무리된 후에도 민원과 산재 신청 건을 해결하느라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감정소모는 말할 것도 없고, 트라우마는 회복되려면 한참 멀었다. 남들 눈에 내가 얻은 건 고작 한 달 남짓한 병가와 직장 내 괴롭힘 대응 경험뿐이겠지만, 나에겐 그보다 크고 깊은 변화가 생겼다.




사건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 모든 과정을 글로 풀어쓰기까지 마음고생이 많았다. '내가 유별난 걸까', '이렇게까지 해서 남는 게 뭘까', '나 때문에 청년 세대가 욕을 먹으려나' 하는 마음에 밤잠을 설친 적도 많았다. 끝까지 물어뜯고 싶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싶다는 양가감정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전 직장이 있는 동네 맛집에도 가기 꺼려질 만큼 상처가 아물려면 멀었다. 그 맛집 근처를 지날 때면 부서원들이 다 같이 밥이라도 먹고 있진 않을까, 가족끼리 산책 나오진 않았을까 하며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믿었던 것들에 대한 배신감은 그 상처에 딱지가 앉을 무렵 칼날이 되어 딱지를 슬슬 긁는다. 모든 사람은 사람다울 거란 믿음, 상사에게는 배울 점이 있을 거란 믿음, 법이 나를 지켜줄 거란 믿음. 그 믿음이 무너지길 반복하다 보니 분노보다 체념이 먼저 찾아왔다.


사람들은 피해자의 선택을 두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 무례하다 싶을 만큼 이래라저래라 하고 너무하다 싶을 만큼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방관자들은 자기에게 불똥이 튈까 쉬쉬하며 나를 안쓰럽게도, 한심하게도 본다. '나라도 살기 위해 입을 다문다'는 말엔 '나만 아니라면 누구 하나쯤은 버려져도 괜찮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도 너를 때리진 않잖아."

"네 수준에 그만한 회사는 다시 못 구해."


이 말들은 침묵과 외면의 또 다른 형태다. 나를 위하는 척하며 나의 고통을 멋대로 축소해 버리는 칼날.




얼마 안 되는 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비롯해 수많은 후유증을 얻었지만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 걸 알면서도 다음에 또 이런 일을 겪는다면 나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한번 맞서 싸울 거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나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면, 본인의 선택이 아닌 남들이 만류한다는 이유로 신고를 망설이고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와 미련은 남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후회나 미련을 덜 남기는 쪽으로 걸어야 해요. 남들이 말하는 '좋게 좋게'에 휘둘리지 마세요. 내가 안 좋으면 그냥 다 안 좋은 겁니다.


'경험자들의 조언'이라는 게 과연 나를 위한 진심인지 아니면 오지랖에 불과한지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게다가 들여다보면 실제 경험자가 아닌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도 망설여진다면 이렇게 상상해 보세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일을 겪고 있다면 당신은 뭐라고 말해줄까요? 배우자가, 부모가, 자녀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면요.


일 키울 생각 말고 죽고 싶을지언정 마냥 버티라 할 건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싸우라 할 건지 말이에요.


나를 위하는 일에 내가 나서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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