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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혜빈 Feb 25. 2016

시베리아로부터의 사색 5

[다섯째 날] 기차 속 일상


8월 21일



일교차가 너무 심해 감기에 걸리기 딱 좋다. 더운 상태에서 잠이 들었지만 극도로 추워지는 새벽 날씨 때문에 선잠으로 밤을 지새웠다.


새로 탄 손님은 아이와 엄마다. 인형처럼 생긴 예쁜 아이가 나와 유진을 계속 번갈아보며 경계한다. 아, 유진은 목사님 이름이다. 우리는 친해져서 서로 ‘Bin' 그리고 '유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쨌든. 내가 그 나이 정도의 아이였어도 어린 나이에 우리 둘의 모습을 보면 좀 무서울 것 같긴 하다. 처음 보는 또는 익숙지 않은 동양인과 거구의 산타클로스 유진과 함께 있으니 말이다.

러시아 아이들은 모두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 예쁘다. 포동포동한 볼 한 번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엄마가 싫어할 것 같아서 관뒀다. 전 세계 모든 아이들은 귀엽지만 특히나 여기 아기들은 좀 더 오밀조밀한 느낌이다.


도시락 컵라면을 좋아하는 유진에게 진짜 오리지널 한국표 도시락 컵라면을 줬다. 가장 특별한 사람에게 주고 싶어서 아껴두고 있었는데, 그게 유진이었다. 매울 것을 대비해 소스를 2/3 정도만 넣고 기다리는데 소스의 매운 향이 코로 느껴졌는지 유진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입에 면을 넣었을 때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새빨간 얼굴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웃으면  안 되는데 그 광경이 너무 재밌어서 혼났다. 불닭볶음면을 먹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펑펑 울지 않을까?


이제 긴장이 좀 풀렸는지 같이 탄 아이가 장난을 곧잘 친다.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다. 태블릿으로 음식 만들기 게임을 하던 아이는 케이크를 만들더니 화면 속에서 한 조각을 잘라 내게 먹여준다. 귀여워 죽겠다. 그래서 나도 이전에 탔던 아줌마들이 줬던 사탕 한 봉지를 건넸다. 



유진한테 러시아어를 배웠다. 오늘은 이거 다 외우기에 도전해야지! 조만간 읽을 줄 알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오늘은 비가 오는 선선한 날씨 덕분에 기분도 좋고, 시간도 빨리 간다.


러시아인들은 누군가 재채기를 하면 뭐라 뭐라 말을 한다. 그동안 너무 궁금했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유진한테 물어보니 아프지 말고 힘내라는 의미라고 한다. "붑스다룹!" (Be healthy!)


지금까지는 계속 역방향 자리에만 탔기 때문에 순방향의 풍경이 어떤지 궁금했다. 처음으로 내 앞에 손님이 없어서 그쪽에 앉았는데 확실히 좋긴 좋다. 하하 


유진에게 한글을 알려줬더니 너무 어렵다며 머리 아파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한바탕 웃었다. 내가 직접 알려줘 보니 다른 나라 언어에 비해서는 한글이 훨씬 어려운 것 같긴 하다. 사실 내가 보기엔 중국어가 훨씬 어려워 보이지만. 

‘고마워’라는 말을 알려줬는데, 입만 움직이면 될 것을 얼굴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들썩거린다. 눈썹도 들썩! 코도 들썩! 입도 들썩들썩! 그 모습이 너무 귀엽다.



용기를 내서 대학생처럼 보이는 중국인 2명에게 말을 걸었다. 대학교 3학년이라는데 20살이라고 한다. 각각 94, 95년생이었는데, 우리와 나이 계산 체계가 달랐다. 이들은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것처럼 러시아의 큰 도시마다 내려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다녀서 커플인 줄 알았는데 그냥 친구라고 했다. 아무리 친해도 이렇게 남녀 단 둘이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니 신기했다. 

시베리아 기차는 참 재미난 곳이다.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이 넉넉한 시간 속에서 많은 이들과 만나 교류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또다시 새로운 손님들이 탔다. 인상이 좋아 보여 다행이다. 티켓을 슬쩍 보니 모스크바행이다. 이로써 우리 칸의 모든 손님들의 종착역은 모스크바가 되었고, 나는 이제 끝까지 함께 할 동행인을 만났다.


기차는 정말 재미난 곳이다.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를 압축시켜둔 느낌이랄까. 여기서 이들의 일상을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할 수 있어서 좋다. 내가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단지 여행만으로는 배울 수 없는 그 나라 사람들의 삶 속에 파고드는 소중한 시간들. 이런 멘트를 치고 있으니 마치 마지막 날인 것 같은데, 아직 5일째다.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하루 종일 온도가 15도 정도로 머문다. 추운 가을 날씨 같다. 나 에스토니아에 가면 추운 날씨  속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찰나에 날이 갑자기 화창해졌다. 러시아인들의 표정 변화만큼이나 변덕스러운 날씨다.


열차 칸 마다 역무원이 두 명씩  배치돼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우리 칸의 담당자 두 명이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구별하지 못했던 것이었는데 오늘 멈췄던 정차 역에서 슈퍼에 다녀오는 길에 보니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3번 칸 홈 앞에 서 있는 거다. 알고 보니 둘 다 우리 칸 담당자였다. 다른 칸에 비하면 그 두 명은 정말 잘생겼다. 진짜 러시아 꽃미남처럼 생겨서 좋았다. 헤헤



기차여행을 마치기 전, 꼭 식당 칸에서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다. 기차 레스토랑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뒷 칸으로 걸어갔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내 자리 3번 칸으로 돌아와 담당자에게 사전을 보여주면서 물으니(이들도 영어를 전혀 못한다.) 자신을 따라오란다. 그리고 나는 그 잘 생긴 사람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몇 칸이고 계속 졸졸 따라다니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내가 3번 칸에 탑승하고 있는데 아마 9번 칸에 식당이 있는 것 같았다. 7~8번 칸은 4인실 또는 2인실이 있는  듯했다. 문이 열려있어 한 번 흘끔하고 들여다보니 아늑해 보이긴 했지만 여자 혼자는 위험할 것 같았다. 그 안에 어떤 사람들이 함께 탈 줄 알고. 

뒷 칸으로 가면 갈수록 좋은 것들이 있는 것을 보니 영화 '설국열차'에서 앞 칸의 좋은 환경으로 가려고 모험을 하는 사람 같았다. 막상 힘들게 식당에 도착하고 보니 재료 준비 시간인지 1시간 뒤에 오란다. 또 엄청난 모험을 하면서 뒤로 가야 한다니, 안 그래도 동양인이라 칸을 지날  때마다 끊임없이 느껴지는 사람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운데.


드디어 식당 칸에 입성. 딱 1시간이 지나자 우리 칸의 담당자가 내 자리까지 직접 와서 가보라고 말을 해줬는데,  또다시 가까이서 보니 진짜 잘생겼다. 식당을 가는 기나 긴 모험 속에서 사람들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뒤통수로도 느껴진다. 

식당에는 많은 메뉴가 있었지만 종업원이 몇 가지 추천해준 것이 있어서(아니면 그 메뉴만 판매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중에서 가장 무난해 보이는 치킨커틀릿을 먹었다. 맛은 별로다. 고기도, 야채도 쥐꼬리만큼만 주고는 304 RUB(6000원)을 받아갔다. 러시아의 싼 물가 치고는 정말 비싼 편인 거다. 그냥 한 번쯤 경험한 것으로 치는 걸로.



러시아어 글자를 이제 다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엄청 느리긴 하지만 낱말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호호. 사람들이 내가 러시아어를 배우는 것을 무척이나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긴 나 또한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을 정말 신기하게 여겨왔지.


유진은 유머감각이 좋은 사람인가 보다. 지금까지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해서 맞이했지만, 모두가 유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 또한 정말 좋다. 기차 안에서 정말 좋은 친구를 만났다. 


오늘 하루도 마무리가 되어간다. 내일 하루만 지나면 정말 이 기차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내일은 모스크바 여행 동선을 한 번 짜봐야지.


우리나라는 알게 모르게 몸매가 좋거나 예쁜 사람만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입고 다닐 수 있는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뚱뚱한 사람이 자기 스스로 용기를 갖고 있어도 짧은 옷을 입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이 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하지만 이곳은 누구나 몸매와 상관없이 입고 싶은 옷을 입는다. 그래서 뱃살이 막 튀어나오는데도 배꼽티를 입고, 다리가 많이 두꺼워도 핫팬츠를 입고 다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대부분이 살이 많이 쪄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우리나라였다면 이런 사람들을 보고 혀를 끌끌 찬다던지, 뒤에서 또는 앞에서 대놓고 욕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만약 러시아에 있었다면 우리 엄마 뱃살은 애교라서 배꼽티도 막 입을 수 있고, 아빠도 더우면 웃통을 막 벗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하하


여긴 우리나라보다 위생관념이 덜하다. 아무 데나 먹을 것을 두고 먹는 것도 그렇고, 화장실의 상태도 그렇다. 사실 내가 만난 러시아는 이 기차 안이 전부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본 이들의 생활 습관은 그렇다. 만약 우리였다면 종이 한 장 또는 휴지 한 장이라도 두고 빵이나 과일을 올려 뒀을 텐데, 여긴 모든 음식을 탁상 위에 부어놓고 먹어서 비위가 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목사님이 갑자기 강남스타일을 부른다. 신기해서 물으니 유튜브에서 많이 봤단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중국인들도 중국인 모두가 그 노래와 춤을 안다고 했다. 인기가 많았던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을 몰랐고, 실제로 외국인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보니까 더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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