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연인을 못 잊고 계신가 봐요?”
생뚱맞은 직장 동료의 물음이 ‘까똑’하고 울렸다.
“아니요?”
그가 갑자기 이걸 왜 물었는지, 또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알 길이 없어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꾹꾹 눌렀다. 손가락엔 표정이 없는 까닭에 그가 내 표정을 보진 못했겠지만, 다행히 그는 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인스타그램에 요즘 올리시는 글들이 그렇게 보여서요”
그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답이 나와서 나는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다시 엄지에 힘을 줬다.
“지금 쓰고 있는 책이 이런 내용이라서요”
그리고 온 답장에는, 그의 엄지에는, 그리고 그의 표정은,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전의 나보다 더 의아한 듯했다.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녜요?”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란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리움은 찬 겨울 햇살처럼 따듯하고 포근하다. 그리움에 누군가를 추억한다는 것은 내리쬐는 햇살에 돋보기를 비추어 조목조목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움은 마음을 새까맣게 다 태우기도 한다. 그러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불같은 사랑! 애타는 마음! 나도 이따금 누군가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내 것엔 구름이 좀 끼었는지, 내 애는 검게 그을리기만 할 뿐, 타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 글은 타고 남은 재 마냥, 나는 그리움에 사무친 것 마냥 글을 썼다.
‘점’에 대한 전시를 봤다. 갑자기 내 몸에 난 점을 세어보고 싶어졌다. 웃옷을 들쳐가며 세어보았지만, 제대로 보이지가 않아 발가벗고 싶어졌다. 사도바울처럼 옷을 찢어발겨 손가락으로 하나, 둘. 점들을 짚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볼록한 아랫배가 생각나서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볼록한 아랫배.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내 러브핸들을 잡던 사랑의 이름들을 떠올렸다.
“작가랑 사귀고 헤어지면, 내 얘기가 책으로 나오나?”
우연히 작가와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눴다.
“선생님도 작가세요?”
뭐라 말할지 몰랐다. 입속에서 몇 개의 단어들을 굴려보다 어떤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시인. 나는 나를 시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립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아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죽 할 말이 없으면 ‘할 말 없음’에 대하여 몇 자 적기도 했다. 마지막 시집을 낸 지, 벙어리로 지낸 지 꼬박 3년이 지났다. 세상이 너무 요란해서 나는 온 세상에 사선을 그어 음소거했다. 그러면 소리 없이 입만 뻥긋대는 모양이 기괴해서 이번엔 눈을 감을 거다. 앞으로 6년 남았다.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도합 6년. 내가 6년 안에 글을 쓸 수 있을까? 7년째 되는 날에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이름으로 치환되지 않는 번호, 그러나 낯익은 번호.
“그거 내 얘기야?”
수분감 가득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넘어 왔다. 네 얘기가 아니야. 네가 그렇게 믿으면. 네 얘기가 아니야. 내가 그렇게 말하면. 어차피 이 이야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더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네 이야기가 맞지만, 내가 아니라 하면 너는 영영 그렇게 알고 있겠지. 네 이야기가 맞지만, 네가 아니라 믿으면 너는 영영 그렇게 알고 살겠지. 그편이 네게 좋겠지. 라고 말하려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꾹꾹 참아대다 간신히 한 마디 뱉어냈다.
“네 얘기가 아니야.”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녜요?”
나는 왜 그러실까.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대꾸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걸 물은 직장 동료도 크게 궁금하지 않았을 테니 괜찮다. 하지만 이 질문은 내게 남았다.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답할 말도 없이. 나는 왜 그랬을까. 나는 무엇을 잊고 사는가, 무엇을 그리워하는가. 삐- 이명이 들렸다. 귀의 울음. 울고 싶지만, 내 눈은 무얼 보고 울어야 할지 몰라 귀가 대신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