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30만 원의 사례비와 새벽의 참치주먹밥
30만 원, 거룩한 훈련비?
스무 살. 갓 성인이 된 나는 교회 간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랐고,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주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졌다. 월급은 30만 원. 출근 시간은 정해져 있었지만, 퇴근 시간은 사실상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조건이지만,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교회는 그것을 월급이 아니라 사례비 혹은 훈련비라고 불렀다. 나는 돈을 벌러 온 게 아니라, 사역을 배우러 온 것이니까. 그 부족한 금액조차 청빈한 삶의 훈련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30만 원에서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떼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20만 원 남짓. 그마저도 맡고 있는 학생들 떡볶이 사주고, 간식 챙겨주는 데 다 썼다. 생활비가 없으니 평일에는 틈틈이 과외와 아르바이트를 뛰어야 했다. 그런데도 교회는 수요예배, 금요철야, 각종 행사에 나를 불렀다.
그 30만 원은 훈련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사역자’라는 타이틀에 묶어두고, 나의 ‘거절할 권리’를 박탈하는 정교한 심리적 족쇄였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라는 말 한마디면, 나는 대학 수업 도중에라도 달려나가야 했다.
새벽의 참치 주먹밥과 리더의 영수증
나를 가장 비참하게 만든 건 육체적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리더십이 청년의 노동을 대하는 태도였다.
어느 날, 목사님이 청년부 행사를 앞두고 비장하게 말했다. “이번 행사는 교회 예산을 아낄 겸 우리가 직접 음식을 준비하자. 그게 헌신이고 사랑이야.”
그의 지시에 따라 나는 전날 대형 마트에서 쌀 포대와 대용량 참치캔을 끙끙대며 날랐다. 그리고 행사 전날 합숙을 하고, 당일 새벽에 일어나, 밥 냄새에 쩔어가며 수십 개의 참치주먹밥을 싸야 했다. 목사님은 쌓여가는 주먹밥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거 봐, 밖에서 사 먹으면 비싼데 이렇게 하니까 얼마나 절약되고 좋냐.”
그때는 그 말이 맞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우연히 보게 된 영수증들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돈 아낀다’며 우리를 새벽부터 갈아 넣었던 그 행사 기간 중에도, 리더십들은 교회 카드로 번듯한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그것은 돈을 아낀 게 아니었다. 청년들의 새벽잠과 노동력을 비용으로 계산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목사님에게 청년의 시간은 0원이었으니까. 자신의 편의를 위한 비용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청년들의 땀은 가성비라는 명목으로 당연시하는 것은 절약이 아니다. 헌신을 가장한 기만이다.
조수석의 코골이보다 더 무서운 원격 조종
비합리성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목사님의 통제 방식은 종종 상식의 선을 넘었다.
공휴일이나 집회 가는 날, 보통 차량 두 대가 움직인다. 한 대는 목사님이 직접 운전하고, 나 혹은 다른 청년 사역자는 청소년들이 탄 승합차를 운전한다. 빗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내 핸드폰이 울린다. 목사님이다.
“야, 비 오니까 속도 줄여. 차선 바꿔. 안전거리 유지해라.”
걱정해서 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명령으로 들렸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를 조종하듯, 여러 차례 전화해서 간섭했다.
차라리 조수석에서 자는 게 나았다. 운전하는 내내 울리는 그 전화벨 소리는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그 순간, 이 전화는 나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나는 지시했다’는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운전대를 잡은 내내 나는 보호받는다는 느낌보다, 감시받고 있다는 공포를 느꼈다. 이것은 리더십이 아니다. 불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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