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행 티켓을 파는 ‘공포의 주식회사’에 대하여
예수님이 아니라 염라대왕을 만난 밤
아직도 그날 밤의 공기가 기억난다. 덥고 습했던 초등학교 여름성경학교, 그리고 사춘기의 열병을 앓던 중고등부 수련회의 마지막 밤. 지하실 예배당 특유의 곰팡내와 땀 냄새가 뒤섞인 그곳에서, 강단에 선 부흥 강사님은 작정한 듯 마이크 볼륨을 높였다.
“너희들 지금처럼 살면 지옥 간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아? 뜨거운 불 구덩이에 던져지고, 거짓말한 혀를 쇠집게로 뽑아서 갈아버리는 곳이야! 뱀과 구더기가 너희 몸을 파먹어도 죽지 못하는 곳이라고!”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나 역시 옆 친구의 통성기도 소리에 묻혀 벌벌 떨며 울었다. 돌이켜보면 그날 밤 우리가 흘린 눈물은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나 회개가 아니었다. 그저 끔찍한 고문실에 끌려가지 않기 위한 처절한 살려달라는 비명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사랑의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었다. 혀를 뽑는다는 염라대왕을 만났을 뿐이다.
성인이 되어 교사가 되고, 학교 현장에 있다 보니 그때의 풍경이 겹쳐 보인다. 마치 성적 지상주의에 찌든 호랑이 선생님이 조회 시간에 출석부를 내리치며 협박하는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너네 이번 시험 망치면 인생 끝이야! 대학 못 가고, 취직도 못 하고, 낙오자 돼서 폐지 줍고 다닐 거야? 어?”
이런 모습들을 보며 내 안에는 풀리지 않는 인지부조화가 생겼다. 학교에서는 이런 협박을 비교육적이라고 비판하는데, 왜 교회에서는 이것을 은혜라고 부를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서, 왜 우리를 협박해서 믿게 하시는 걸까?
스토커와 연인, 그리고 과속하는 교회 승합차
사랑하는 연인 사이를 상상해 보자. 남자가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사랑해 줘. 만약 나를 떠나면 너를 죽여버릴 거야. 널 지하실에 가두고 영원히 고통 줄 거야.”
우리는 이런 사람을 로맨티시스트라고 부르지 않는다. ‘스토커’이자 ‘잠재적 범죄자’라고 부른다. 진정한 사랑에는 협박이 개입할 틈이 없다. 그런데 왜 일부 강단에서는 하나님을 스토커처럼 묘사하는가?
“십일조 떼먹으면 사업 망한다”
“주일에 놀러 가면 다리 부러진다”
이 말을 뒤집어 “십일조 많이 하면 부자 된다”, “주일 성수 잘하면 좋은 대학 간다”라고 회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복채를 많이 내면 액운을 막아주고 복을 준다는 무속 신앙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이것은 사랑을 볼모로 잡은 종교적 가스라이팅이다. 또한 하나님을 돈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저급한 거래일뿐이다. 사랑해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보복이 두려워서 혹은 콩고물이 탐나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것은 노예 계약이거나 비즈니스지, 신앙이 아니다.
사랑 없이 공포와 이익으로만 유지되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윤리의 실종을 낳는다. 교회의 이중성은 여기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내가 빈번히 목격했다. 주일 예배 시간에 늦었다며 교회 봉사 차량이 도로에서 난폭 운전을 한다. 신호 위반을 하고, 끼어들기를 하며 다른 운전자에게 위협을 가한다. 심지어 창문을 내리고 욕설을 뱉기도 한다. 세상의 법규와 상식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그 차 안에서는 찬양을 틀어놓고 “할렐루야”를 외친다.
예배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법쯤은 어겨도 된다는 오만함. 그러면서 교회 차량 안에서 나누는 권사님들의 대화는 또 어떤가.
“이번에 김 집사네 아파트값 올랐대”, “누구네 딸은 살이 좀 쪘네.”
입으로는 거룩을 말하지만, 관심사는 철저히 세속적이다. 세상보다 더 윤리적이지도, 더 매력적이지도 않으면서 오직 ‘지옥 공포’ 하나를 무기 삼아 성도들을 붙잡아두려 한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위대한 존재 앞에서의 거룩한 '경외'이지, 맞을까 봐 벌벌 떠는 '공포'가 아니다. 건강한 신앙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분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지, 단지 지옥 불에 탈까 봐 무서워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