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앞의 폭력, 세속화된 응답, 그리고 치열한 모름의 가치
위로라는 이름의 폭력, 그리고 욥의 친구들
친하게 지내던 교회 동생의 어머니가 암 투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였다. 그 동생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성실하게 교회를 섬기던 맑은 아이였다. 온 교회가 기도로 매달리던 어느 날, 평소 ‘기도 좀 하신다’는 한 권사님이 동생에게 다가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선포했다.
“내가 기도 중에 아주 확실한 응답과 말씀을 받았어. 하나님이 어머니 고쳐주신대. 걱정하지 마!”
불안에 떨던 가족들에게 그 말은 생명줄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몇 주 뒤, 동생의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장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나는 신을 향해 분노하기보다, 그 권사님의 가벼운 확신에 깊은 탄식과 아쉬움을 느꼈다. 대체 왜 우리는 타인의 찢어지는 고통 앞에서 ‘모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섣부른 정답을 들이미는 걸까. 마치 알량한 교리로 고난받는 욥을 가르치려 들었던 욥의 친구들처럼 말이다. 나는 그저 빈소 한구석을 조용히 지키고, 훗날 엉엉 우는 그 아이를 다시 만나 하염없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은 무고한 아이들의 고통 앞에서 신의 정의를 향해 피 끓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알량한 논리나 “다 뜻이 있을 거야”라는 얄팍한 신정론은 벼랑 끝에 선 고통 앞에서는 철저히 무력하다.
독일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감옥에서 “오직 고난 받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라고 고백했다. 우리가 믿는 신은 하늘 보좌에서 팔짱을 끼고 고통의 이유를 이성적으로 설명해 주는 분이 아니다. 친히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인간의 고통 한가운데로 동참하신 분이다. 그러니 타인의 거대한 아픔 앞에서는 차가운 해석과 예언이 아니라, 그저 곁을 지키며 함께 울어주는 다정한 침묵과 기꺼이 내 시간과 온기를 내어주는 실질적인 사랑만이 가장 성경적이다.
“Deus vult(하나님이 원하신다)”: 십자군과 엘리베이터
자신의 확신이나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가장 잔혹한 비극을 낳았다.
11세기 말,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군중을 향해 “Deus vult!(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라고 외쳤다. 이 한마디에 피비린내 나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겉으로는 성지 탈환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영토 확장과 정치적 탐욕이 들끓고 있었다. 중세의 마녀사냥 역시 교리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거룩한 명분 아래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불태운 광기였다. 절대자의 권위를 빌려 인간의 통제욕을 정당화하는 순간, 합리적인 비판과 양심은 마비된다.
이 무서운 역사의 망령은 오늘날 우리네 일상과 교회 시스템 안에서도 아주 세련된 얼굴로 부활한다.
어느 날, 교회 목사님이 강당에 모든 사역자를 불러 모았다. 장로님부터 주일학교 교사까지 빼곡히 모인 자리에서 목사님은 종이 한 장씩을 돌리며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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