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달과 6펜스라는 책 제목은 익숙하지만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책이었다. 독서모임 덕에 고전을 이어서 읽고 있어서 만족스럽다. 달과 6펜스의 상징을 알고 나니, 어쩌면 이런 제목을 지었는지 매혹적이었다. 작가들의 상징과 은유는 늘 감탄을 가져온다.
나는 늘 꿈꾸는 삶을 지향했다. 나의 지향을 향해 배워가고 알아가고 느끼는 생활들은 나를 설레고 벅차오르게 했다. 과거형인 것은 지금의 나는 현실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6펜스의 세계에서 달의 세계에 눈을 거두지는 못하고 달을 향해 아득하게 쳐다보고 있는 삶이랄까.
스트릭랜드를 보면서 달의 세계가 더 멀게 느껴졌다. 나는 현실 때문에 달의 세계를 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열정과 한계인 것이다. 과연 스트릭랜드가 행복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면 아니라고 여겨지는 것을 보며, 나는 태생이 6펜스의 세계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또 스트릭랜드가 아무런 가책도 없이, 과거를 돌아보지도 않고 끊어버리는 것을 보며 오히려 6펜스의 소중함을 떠올려보게 되는 나였다.
글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하며 평생 이방인처럼 산다는 표현을 읽을 때에서야, 스트릭랜드의 결정들과 광기 같은 열정이 조금은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는 나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만 같았다. 스트릭랜드 옆에 있던 사람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이나 예술성을 알아보고 거기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예술성이 넘치더라도 스트릭랜드의 삶이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면의 욕구와 충동, 예술에 대한 경탄 등이 스트릭랜드에게 끌리도록 만들었을 것 같다.
나만의 시간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다른 것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때가 많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현실과의 부조화 속에서 스트릭랜드처럼 다 끊어내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화된 자아가 책임과 도덕성 등으로 나를 다시 잡아둔다. 다행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비교적 사회 안에서 용인되는 삶을 꿈꿔왔고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한 적은 없다. 자기가 바라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잘 들어나가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이방인이 아닌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이다. 또, 중간에 헤매다 자신의 길을 찾은 이들에게 섣불리 삶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아야겠다 싶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그에게 생존을 위한 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니.
나는 달의 세계에 가지 않지만, 그 절충점의 세계를 마련해 나가며 숨 쉬고 있다. 그 절충점의 공간은 책이었다. 책이라는 공간은 나를 다시 꿈꾸게 하기도 했고, 꿈꾸는 세계로 데려다주기도 했으며,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 때 쉴 곳이 되어주는 느낌이었다. 나는 타인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나의 기준대로 움직이며, 실행하는 편이다. 그러나 나의 기준이 이미 굉장히 사회화된 틀 안에 있기 때문에 무리가 없는 것이다.
고갱의 생애를 모티브로 썼다고 하는데 고갱의 작품들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또, 나의 결말에 나의 삶은 타인들에 의해 어떻게 재해석이 될지 궁금해지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