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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택 Feb 03. 2023

[플래그 테일 : 이노센스] 묘사가 가져오는 몰입감

  조현병이나 편집증 등 정신 질환을 표현한 게임 [헬 블레이드]의 개발 과정을 영상으로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디오에 특히 집중하여 주인공의 고통을 드러내려고 노력했고, 필자는 이게 게임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표현 방식은 좋다 치더라도 유저가 정신병을 겪고 싶어 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도 그 작품은 게임성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게임이 주는 경험 자체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긴 했다


  하지만 개발진은 게임 안에서 무언가를 계속 드러내야 합니다. 좋은 것만 하지 말고, 유저들이 원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대체로 성공한 것이 [플래그 테일](이하 플테)입니다. 흑사병이 도래한 14세기 프랑스,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던 곳을 이 작품은 매우 세세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래픽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이번엔 [플테]의 표현 방식이 어떠했는지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스토리 내용 일부를 다루고 있으니 스포일러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게임 초반부터 심상치않은 변화를 보여준다




  지저분함 묘사

  앞서 언급했듯 [플테]의 배경은 14세기 중세 프랑스입니다. 그 당시 유럽이라면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도시가 아니라 변방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화려한 고딕 양식보다는 오래되고 흠집 난 건물들을 더 많이 보여줍니다. 배경을 사실 그대로, 특히 지저분함을 많이 드러낸 겁니다.


시골 느낌이 잘 드러난다


  필자가 생각하는 게임 그래픽 개발 풍조는 폴리곤, 택스쳐, 디테일, 빛 반사 순서입니다. [플테]는 특히 흠집, 녹, 파편 등의 디테일을 많이 챙겨서 중세 유럽에 대한 환상을 깨고 전체적인 게임 분위기 조성에 성공했습니다. 14세기 프랑스는 백년 전쟁과 흑사병으로 죽음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따사로운 자연이 가득한 극초반만 지나면 썩은 시체가 즐비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죽은 가축이 미로 벽처럼 쌓여있기도 합니다.


가축과 인간 시체


  그리고 주인공의 모습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갖습니다. 지방 귀족인 그녀는 깔끔한 옷과 고상한 외모를 가졌지만, 힘든 일을 보내면서 점점 더러워지고, 후반부에선 흉터와 꾀죄죄한 모습만 남습니다. 고통이 지나갔지만 주인공의 성장과 변화를 잘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점점 강인해진다




  쥐 묘사

  [플테]에서 가장 대표적인 적은 쥐입니다. 흑사병을 몰고 다니지는 않지만 바닥을 가릴 정도로 많이 돌아다니면서 생명체를 산 채로 잡아먹습니다. 이번 작품은 이를 혐오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게임적 허용을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대부분 비명을 지르며 죽는다


  [플테]에서 쥐는 무리를 지으면서 독립적으로 움직입니다. 사실상 일정 범위 내에서만 자기 마음대로 이동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먹만 한 짐승 수백 마리에게 부딪히는 성질이 있다면 구석에 갇힌 RC카처럼 제자리에서 움찔거리기만 할 겁니다. 그래서 [플테]의 쥐는 서로 충돌하지 않고 통과하며 지나갑니다. 어두침침한 배경에 작고 까만 무언가가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티가 잘 안 나는 것일 뿐입니다.


붉은 원을 잘 보면 쥐끼리 통과해서 지나간다


  그리고 쥐에게 빛을 피하는 성질도 있는데, 이것도 잘 보면 쥐가 도망치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밀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AI로 피하는 거라면 옆으로 이동하는 게 설명이 안 됩니다. 아마 눈에는 안 보이지만 쥐랑만 충돌하는 벽이 불과 조명에 달려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하면 AI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도 없고, 예기치 못한 버그를 줄이기에도 좋습니다.


빛이 있는 곳으로 가다가 밀려가고 있다




  캐릭터 성격

  배경을 잘 묘사하면 유저가 세계관에 몰입하기 쉬워집니다. 그리고 캐릭터에게 설득력이 생기면 플레이어는 게임 진행을 납득할 수 있습니다. [플테]도 이를 알기에 각 인물의 성격을 잘 묘사하려고 했지만 다소 서툰 모습을 보였습니다. 멜리라는 캐릭터는 쌍둥이 오빠의 죽음을 보고 복수를 다짐합니다. 바로 적진으로 쳐들어가자고 할 정도로 분노하지만 그때부터 대사가 다소 오글거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아마존 전사 아미시아와 분노의 멜리가 간다'고 외칠 때는 지금까지의 쌓아둔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유치했습니다.


이 장면도 조금 오글거렸다


  로드릭이란 인물의 죽음도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합니다. 이때 별다른 설명도 없어서 갑작스러운 퇴장이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 개발진은 이유를 다른 곳에 숨겨뒀습니다. 그곳 근처에 로드릭이 추억의 대장간이 무너져있었으며, 그는 그걸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은 겁니다. 이 대화를 보면 로드릭의 희생이 자살에 가까웠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유저가 뻔히 보이는 길을 굳이 마다하고 헤매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대장간이 이동 경로 사이에 있었다면 이야기가 더 매끄러웠을 겁니다.


퍼즐까지 풀어야 들어갈 수 있다




  동생 묘사

  [플테]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개발진이 만든 설정에 따라 움직입니다. 주인공의 동생도 마찬가지이지만, 5세 정도로 어리다 보니 특수한 컨셉보다는 어린 아이 특유의 행동 패턴을 더 많이 보여줍니다. 그래서 유저마다 반응이 극과 극을 달립니다. 작품 내에서 동생은 자주 칭얼거리고, 재미있는 게 보이는 순간 갑자기 큰 소리로 뛰어다니며, 제멋대로 가출까지 합니다. 눈만 마주쳐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겨우 도망친 유저는 동생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볼 겁니다.


남동생은 답답한 마음에 이러한 행동을 했을 듯


  하지만 어린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건 사실이지만 동생을 보살펴야 할 주인공마저 겨우 15살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이들이 갑자기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문제를 침착하게 해결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동생이 답답하게 행동했던 건 그저 그 나이에 맞는 미숙함일 뿐입니다.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주인공조차 너무 어리다


  그리고 예측하기 힘든 그의 행동이 게임 플레이에 다소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주로 플레이하는 건 주인공이지만, 가끔 동행인에게 특정 행동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동생만 할 수 있는 건 개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입 액션이 많다 보니 동생을 다른 곳으로 보내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필자만 느낀 걸수도 있지만, 초반엔 너무 믿음직하지 않아서 갑자기 사고 치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혹시나가 역시나




  추천

  앞서 언급했던 것들 외에도 캐릭터의 어색한 표정 등 [플테]에서 몰입감을 깨는 요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다 포함해도 이번 작품의 몰입감은 좋은 편입니다. 음악도 분위기와 잘 어울리고, 인물들이 달라지는 모습도 충분히 와닿습니다. 게임 플레이도 전투보다 퍼즐 중심이라서 생존에 더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스토리와 퍼즐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특히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성장물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더욱 만족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판타지 요소가 강해져서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연금술까지는 괜찮아지만...




  다음 편 예고

  [플테]의 퍼즐 가면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처음엔 행동이 다양하지 못한 만큼 답이 정해져 있었지만, 후반엔 현재 가지고 있는 재료와 상황에 따라 자기만의 답을 직접 찾아야합니다. 사실 이건 다른 게임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과 이를 해쳐나갈 수 있는 수단을 유저에게 차례로 학습시키고, 점점 어려운 문제를 주는 겁니다. 옛날 게임의 경우 패키지에 동봉된 메뉴얼이나 잡지 등으로 막힌 구간을 풀곤 했습니다. 다음에 다룰 작품엔 그 메뉴얼이 안에 들어간 게임입니다. 고전적인 감수성이 느껴지지만 실상은 악독할 정도로 어려운, 바로 [튜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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