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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정 Aug 19. 2018

식민지, 중국 상인 그리고 쌀

19세기 베트남, 미얀마 그리고 태국의 쌀 수출 



최근 밀턴 오스본(Milton Osborne)의 동남아시아사(Southeast Asia - An Introductory History)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동남아시아 시장을 무대로 일을 하며 다시 이 책을 읽으니 눈에 들어오는 게 많다.


밀턴이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주목하는 시기는 19세기다. 이 시기에 유럽 열강들의 동남아시아 진출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본격화되면서 이 지역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날 ASEAN을 구성하는 근대적 국가의 경계도 식민지배와 함께 탄생했다. 비록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이 수백 년 전부터 이 지역에 등장하여 유럽에 의한 식민지 건설의 역사를 시간적으로 올려 잡을 수 있겠으나, 스페인의 필리핀 북부 지배를 제외하면 그들의 지배는 믈라카, 바타비아 등 주요 거점에 한정되었다. 또한 그들의 지배는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유럽에서 가져온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이식하는 것보다, 이 지역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기존의 질서와 체제에 편승하여 향신료 무역에 주력한 네덜란드처럼 주로 경제적인 이득에 만족하는 상인(trader)들의 활동으로 제한되었다 (이 경우 또다시 필리핀은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동남아 진출은 선배 유럽 열강들의 그것과 달랐다. 앞서 인도네시아 일부 거점에 자리를 잡고 있던 네덜란드의 지배방식도 이 시기에 이르러 크게 달라졌다. 1602년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8세기 말에 이미 해체되었다. 19세기 유럽 열강의 직간접적 지배는 주요 거점들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깊숙이 개입하여 동남아시아에 막대한 외부적 충격을 가져왔다.


그중 경제에 대해 말하자면 이 시기 동남아시아는 유럽 식민모국의 거대한 원료조달 시장이 되었다. 고무, 주석 그리고 쌀이 동남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수출되는 가장 중요한 원자재(commoditiy)였다. 산업화된 원자재 생산과 수출이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동력과 자본의 유입이 필수적이었다. 자본과 노동력이 투입되는 방식은 품목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었으나, 나라마다 다른 식민지 경험에 따라 더욱 흥미롭고 큰 차이를 보였다. 오늘날 전 세계 양대 쌀 수출국으로 꼽히는 베트남과 태국, 그리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미얀마(버마)의 산업화된 쌀 생산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의 차이에서 탄생하였는가 살펴볼 만하다.


전통시대에도 메콩강(베트남), 짜오프라야강(태국) 그리고 이라와디강(미얀마)은 흘렀다. 젖줄과도 같은 강을 따라 비옥한 농경지는 부족함이 없었고, 쌀이 자라기 좋은 고온다습한 동남아의 기후는 마찬가지로 쌀을 재배하는 한국이나 일본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전통시대의 쌀 생산은 수출을 위한 상품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가족단위의 소농들에 의해 생산된 쌀은 한 나라 안에서의 유통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대체로 자급자족을 위한 것이었다. 식민지배와 함께 수출을 위한 대량 생산이 이뤄지자 대규모로 농경지를 개척하고 운영하기 위한 노동력, 종자와 농기구를 마련하기 위한 자본이 필요해졌고 이는 기존에 땅을 경작하던 가족단위 소농들의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호찌민 아저씨 "Uncle Ho"


베트남의 경우 자본과 생산정책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는 것은 프랑스인들이었다. 여기에 협력하는 소수의 베트남 지주들이 달콤한 열매를 누렸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인들의 활약이다. 유럽 열강들의 동남아 식민지배에 핵심적인 파트너였던 중국인들도 그 열매를 함께 나눴다. 동남아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현지인들이 하기 싫어하거나 잘 하지 못하는 일들 (밀턴의 표현에 따르면 "Chinese immigrants in Southeast Asia filled roles in society that otheres would not or could not fill")을 도맡으며 이를 필요로 하는 식민 당국과 밀월 관계를 즐겼다. 청조 말기의 본토에서의 혼란을 피해서 온 중국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급격히 세를 불려 나갔다. 장사에 밝은 중국인들은 베트남 남부 메콩델타의 정미 시설을 장악하고 동남아 구석구석과 본토까지 이어지는 화교(華橋, 다리 '橋'가 참 적절한 표현이다)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새로운 시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반면 노동력을 담당하는 베트남 사람들은 소작농이나 단순 임금 노동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했다. 


미얀마도 베트남과 대체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차이가 있다면, 영국의 지배를 받은 미얀마는 문화적 차이에도 지리적으로 인접한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의 행정적 영향력 아래 있었다. 동남아에 끼친 영향과 장사 수완 등 여러 가지에 있어서 중국과 라이벌을 이루는 인도인들의 미얀마로의 유입은, 영국의 울타리 아래 사실상 제한이 없었다. 중국인들이 베트남에서 수행한 것과 비슷한 역할과 더 나아가 최말단 노동력까지 인도인들은 현지인들을 밀어내고 차지했다. 여담이지만, 싱가포르에서 살면서 봐도 화장실 청소부나 공사장의 인부는 대부분 피부색이 어두운 인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이다.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의 역할은 묘하게 비슷한 것 같으면서 분명히 겹치지 않는 부분이 보인다.


태국인들에게 생불로 추앙받는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많은 비용을 치렀음에도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 유일하게 식민지배로부터 자유로웠던 태국의 경우는 특별하다. 이 시기 태국도 베트남이나 미얀마와 마찬가지로 새롭게 개간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농경지가 있었다. 하지만 태국에서의 농업개발은 어디까지나 태국 왕실과 관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베트남이나 미얀마가 경험했던 식민정부 등 외부세력의 상업적 이해관계로부터 태국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의 희생과 고통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이겠으나, 태국의 농민들은 외부의 압력에 직접 노출되어 있던 베트남이나 미얀마의 농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체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태국에서도 화상(華商)들의 활약은 필수적이었고 두드러졌으나, 태국에서 상인과 농민의 관계는 '착취(exploitation)'보다 '동반자(partnership)' 관계에 있었다고 밀턴 오스본은 바라보고 있다. 이런 차이가 아마 호찌민 아저씨의 베트남과 라마 9세의 태국, 양국의 이후 역사 전개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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