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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국 Jun 11. 2023

마음의 빛

영재고 입학 20주년 행사 中 졸업생 답사


  안녕하십니까, 어쩌다 행사의 준비를 맡고 졸업생 대표까지 하게 된 서정국이라고 합니다. 답사를 드리기에 앞서, 이 학교의 교정에 처음 발걸음을 옮긴 지 2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오늘, 저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신 선생님들께 우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년 전 이곳에서 시작한 저희 여정의 중간에서, 그때 계셨던 선생님들과 지금도 이 자리를 지키고 계신 선생님들을 모신 이런 뜻깊은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쁘고, 또 영광입니다. 오늘 저희는 각자가 여기서 시작한 그 여정을 공유하고, 다시 한번 모교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고자 모였습니다.

  저의 이 인사가 끝나고 나면 한 명씩 졸업생들의 소개를 드리는 순서가 있습니다. 지금은 일단 제가 이 앞에 나와 있으므로, 저부터 영재고에 입학한 후 지난 20년 동안 어떤 경로를 통해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간략히 말씀드릴까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지금 중앙대학교병원 소화기내과에서 임상조교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국과학영재학교의 대강당에서 의사가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어쩌면 이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졸업생이 이런 행사를 맡아서 준비해도 괜찮을까, 선생님들과 얘기를 해도 되는 걸까, 그리고 이렇게 졸업생 대표로 인사를 해도 되는 걸까,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어쩌면 저만이 할 수 있는 얘기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서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지난 20년 동안 어쩌면 홍길동 같이, 모교를 당당히 모교라 부르지 못하고 저의 모교 또한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없었던 한 졸업생의 변명이자 그럼에도 떳떳하게 살아가고픈 한 사람의 바람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변명은 제가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치렀던 수학 PT에 통과하고 김훈 선생님의 기초미적분학 수업을 들었던 일부터 시작합니다. 정말 그때부터 저는 김훈 선생님을 뵙기가 부끄러워서 항상 피해 다녔는데요, 아마 수학 PT를 통과한 사람들 중에서 제가 제일 못 따라간 것 같습니다. 결국은 아마 과락을 피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요… 수학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는데 주변에 너무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저는 처음 맛보는 자유에, 주변 친구들의 뛰어남에, 제 길은 다른 데 있겠거니, 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은 카이스트에 진학하고 똑같이 반복되었습니다. 벤틸레이션 수단이 없었던 그곳에서 저는 중간고사 기간에 아팠었고, 역시 시험들을 대거 망치면서 제 길은 혹시 또 다른 데 있는 건 아닐까 고민해야 했습니다. 이제 더 여유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반수를 선택하게 되었고 터널과도 같았던 그 시간을 지나 저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택의 순간들은 중간중간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것은 예를 들자면 의대를 서울로 갈 것인지, 가족이 있는 부산에서 다닐 것인지, 소위 돈이 되는 전공을 할 것인지, 좀 더 힘들고 부담스럽지만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과를 할 것인지, 학계에 남아 대학교수를 목표로 할 것인지, 개원을 할 것인지 등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요? 돌이켜보면 저에게는 언제나 모교에 대한, 엄밀하게는 김훈 선생님에 대한 부끄러움과 내게 이런 멋진 기회가 주어졌었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 자랑스러운 동기들과 그들에게 떳떳하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산에서 의대를 졸업한 이후 서울아산병원에서 소화기내과 수련을 받으며 보다 치열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해서는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고혈압 약제 사용과 코로나 감염 간의 관계를 밝히는 논문을 써서 조금이나마 세상에 도움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조금 길게 제 소개 겸 변명을 들려 드렸는데요, 지금 이 자리를 보시면 실제 저희 졸업생 비율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의사들이 지금 저를 포함하여 셋 밖에 없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 친구들이 오늘 여기에 오지 못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거기에 죄책감과 책임감,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린 자식이 되어 오늘 같이 모두가 모이는 명절에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마음은 누구나 부모님께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마음이지 않을까요?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은혜를 떠올리고, 이제는 시간이 흘러버려 더 잘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지금. 늘 아쉬운 우리가 어리고 젊었던 지난날. 저는 그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빚, 혹은 그때 선생님들께서 심어주신 어떤 밝고 빛나는 진취적인 열정 같은 것이 의사가 된 저와 같은 졸업생에게도, 김대겸 박사와 같은 자랑스러운 자식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찬가지로 존재해서 저희를 지금껏 나아가게 하였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동기 박사들, 석사들, 의사들, 대표들, 연구원들, 과장들, 부장들.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졸업생으로 여기건 그렇지 않건 간에 모두를 대신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이제야 다시, 부모님과도 같은 저의 선생님들께, 사랑하는 모교에게, 형제와도 같은 저의 동기들에게. 지금까지 저를 살아오게 한 것은 당신들이며, 살아 있는 동안은 잊을 수 없는 추억들과 힘을 저에게 심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말을 못 했지만 너무 늦지는 않기를 바라며, 진심으로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모두들 건강히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저희는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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