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화씨 450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정국 Jul 10. 2019

우리에게 '미치게' 친절한 철학책이 필요한 이유

안상헌 <미치게 친절한 철학>

 

"Just a spoonful of sugar helps the medicine go down"
- <Mary Poppins>




  철학자의 원문이 아닌, 그걸 누군가가 나름대로 정리해서 쓴 글을 읽노라면 묘한 죄책감이 든다. ‘내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어는 봤지만, 읽을 용기는 없고 시간은 더더욱 없으니 이거라도 읽어야겠다.’에서 오는 죄책감이랄까. 원문이 아닌 해설을 읽다 보면 조금 서글퍼지기도 한다. 의구심마저 든다. 정말로 이 철학자가 이런 문장을 썼을까? 철학자는 이런 뜻으로 이 말을 했을까? 게다가 이 책의 저자는 철학자도 아닌 것 같은데, 이 사람이 써놓은 걸 믿어도 될까?


  의심 가득한 마음가짐으로 찬찬히 들여다보았음에도 <미치게 친절한 철학>의 페이지는 잘 넘어갔다.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쾌감이 일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지나 고비인 데카르트를 넘어서 칸트, 마르크스를 독파하고 나자 조금 신선하다고 할 만한 비트겐슈타인과 레비스트로스에 다다랐다. 문장들도 시원시원하고 무엇보다 어려운 개념들을 어렵게 설명하지 않아서 좋았다. 결국 나는 3일 만에 철학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여기 쓰인 말들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제쳐두고 나는 어쨌든 철학책 한 권을 다 읽은 거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기분은 좋아졌다.


  이 책은 사실 선물 받은 것이라 모종의 책임감도 있었고(제공받은 도서임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원래도 책을 두 번씩 읽는 습관이 있어 책을 다 읽은 다음 날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실은 이런 종류의 철학 입문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로 철학에 관심이 있어 공부를 하고자 한다면 원문을 찾아 읽어야 할 일이다. 반면 입문, 교양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철학 ‘해설서’는 저자가 철학이라는 도구를 빌려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도 다르지 않았다. 두 번째로 읽었을 때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이야기가 들어 볼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이 리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파악한 이 책의 핵심은 ‘형식’에 있다.


  나는 3일 만에 이 책을 다 읽었다. 아마 이 책을 구입한 대부분의 독자들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이 책을 일찍 읽어냈으리라. 다 읽은 후의 감상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 이렇게 철학이 쉬웠나?’ 혹은 ‘현대철학까지 읽은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별 거 없네.’ 아니면 ‘나는 알랭 바디우가 좋아, 이 사람 내 스타일이야.’ 등이다. 책이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화두로 향하는 마중물이 되기도, 누군가에게는 뇌 한 구석에 빛바랜 흔적으로만 남기도 한다. 그런데 한 책이 무엇이든 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일단 읽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호기심에 있다. 다음에는 뭐가 나오지? 이 궁금증을 자극하지 못하면 말초적 쾌감으로 가득 찬 휴대폰 세상에서 털고 일어나 다시 책장을 넘길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강력한 이야기의 힘이다.


질문은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묵직한 망치처럼 우리를 흔들어야 하고 설명은 달달한 설탕으로 코팅한 쓴 알약, 당의정처럼 잘 넘어가야 한다.


이것을 한 흐름으로 엮어내어 다음에 무엇이 올지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재미있는 이야기의 조건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다. 오래 살아남아 전해지는 신화 속에 역사와 진실의 단면이 숨어 있듯, 좋은 이야기 속에는 진실이나 진리, 혹은 현실의 편린이 담겨 있어야 한다. <미치게 친절한 철학>에서는 당대를 깊이 고민한 철학자들의 목소리를 지금, 여기로 불러온다.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에서 인류의 절반을 말살하려는 타노스의 문제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제의식과 연결시켜 얘기하기도 한다. 어려운 내용을 조곤조곤, 다정한 말투로 알려주는 문장의 행간에서 "이건 당신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라고 일깨우는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친절한 저자의 말투에 실은 이 책의 의도가 숨어 있다. 생각해보면 제목에서부터 이미 눈치를 챘어야 했다. '미치다'라는 동사에는 두 가지 뜻이 있지 않은가. 매혹되어 정신을 잃는다는 뜻과 영향이 어디까지 가서 닿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저자의 욕망을 읽을 수 있다. 지독하게도 닿고 싶은 것이다. 독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조금이라도 변화를 일으켜보고 싶은 것이다. 눈에 쏙 들어오는 제목,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읽히는 철학, 다정한 문체. 이 책은 일관되게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진 책이다. 독자에게 '미치는' 것이다.


  독자에게 미치지 못하는 책은 아무런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은 정말 '미치게' 친절한 책이다. 물론 이 책이 철학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진 않다. 이해를 돕고 맥락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지를 쳐내는 과정이 필요하니까. 과하게 가르치려들진 않았지만 어렴풋이 주관성이 가미된 해석들도 느껴졌다. 나중에 철학을 더 깊이 알게 되면 '아, 그때 읽었던 그 책은 순 야매였구나'라고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 가지 측면에서는 훌륭하게 성공한 철학책이다. 그리고 그것 누군가는 큰 첫걸음을 내딛게 될지 지금 누가 알겠는가. 처음 완독한 철학책에서 받은 감동이 나비 효과처럼 뻗 나가 세상을 바꾸고, 시대를 바꿀지 누가 알겠는가. 그 시작은 끝까지 붙들고 읽게 된 한 권의 '미친' 철학책일지도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