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는 말 없이 무너진다, 그러나 다시 연결될 수 있다!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우리 팀은 점점 말이 없어졌어요.” “요청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일방적이죠.” “설명을 듣지 못하니 점점 무기력해져요.”
이슈가 많은 조직의 여러 현장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다. 처음엔 대화가 줄고, 다음엔 피드백이 멈춘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정보 공유도, 요청도, 반응도 없이 각자도생의 조직이 되어 있다.
겉으로는 갈등이 없어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조직 간 반목과 피로감이 축적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하이브리드 업무 환경은 서로의 업무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왜 이걸 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대답되지 않은 채 쌓여간 조직들은 더 큰 고통을 쌓아왔다. 이런 현상은 대개 ‘소통’ 문제로 요약되지만, 그 이면에는 더 깊은 불공정 인식과 신뢰(trust)의 부재가 자리잡고 있다.
상황 1. 정보가 흐르지 않는다. 같은 조직이면서도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피드백도 없다. 누군가 일을 완수해도, 왜 그런 방향이었는지 설명은 없다. 이렇게 고립된 소통 구조는 곧 '우리 vs 그들' 프레임을 만든다. 같은 조직 안에서 다른 부서를, 동일 직무군을 경쟁자로 느끼게 되는 이유다. 협업보다 분리, 공유보다 방어가 우선이 된다.
상황 2. 요청이 아니라 일방적 통보다. '요청'이라고 포장된 메시지는 사실상 일방적인 업무 지시다. 말은 공손하지만 선택권은 없다. 질문을 하려 해도, 이미 분위기는 굳어 있다. 이런 소통 방식은 구성원에게 ‘나를 통제하려 한다’는 인식을 주며 저항감을 키운다. 그 결과 자율성과 주인의식은 약화되고, ‘내가 왜 이걸 해야 하지?’라는 의문만 남는다.
상황 3. 설명도, 피드백도 없다. 설득 없는 추진, 설명 없는 속도. 일이 진행되지만 배경을 모르고, 결과에 대한 피드백도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알아서 하세요’라는 무기력한 태도를 익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조직 심리학에서 말하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다. 동기 없는 수행은 오래가지 못하고, 점차 정체와 단절로 이어진다.
신뢰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신뢰는 단순히 ‘믿는다’는 감정이 아니다. Mayer, Davis, Schoorman(1995)에 따르면, 신뢰란 ‘다른 사람에게 나를 취약한 상태로 둘 의지(willingness to be vulnerable)’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상대가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심리적 기대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협업을 시도할 수 있다.
이 신뢰는 세 가지 핵심 판단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능력(capability): 일을 해낼 수 있는가
진실성(integrity): 정직하고 일관된가
호의(benevolence): 나에게 해를 끼치려 하지 않는가
이 중 하나라도 균열되면, 신뢰는 서서히 무너져내리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불신(distrust)이 아니라 방어(defensiveness)가 자리잡는다. 말은 줄고, 질문은 멈추며, ‘적당히 버티자’는 태도만 남는다.
신뢰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다. 이것이 Schoorman et al.(2007)의 통합 모델이 말하는 핵심이다. 신뢰는 특정 사람의 성격이나 관계의 친밀도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뢰는 역할과 맥락, 권한과 책임, 의사결정 구조라는 시스템 위에서 작동하는 '관계적 구조'다.
협업은 관계다, 관계는 신뢰다 : 관계의 단절은 일의 단절로
Graen & Uhl-Bien(1995)의 LMX(Leader-Member Exchange) 이론은, 리더와 구성원 간의 신뢰 기반 관계가 조직 몰입과 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다. ‘좋은 관계’에 있는 구성원은 더 책임감 있게 일하고, 그렇지 않은 구성원은 최소한의 역할만 수행하려 한다. 결국 관계는 성과의 기반이 된다.
Rousseau(1995)는 이를 심리적 계약(psychological contract)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했다. 조직과 구성원 사이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서로 기대하는 일종의 계약이 존재하며, 이것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자발성을 잃는다. 특히, '내가 조직에 기여한 만큼 조직도 나를 존중할 것'이라는 기대가 깨어질 때 무기력과 냉소가 확산된다.
Ferreira-Oliveira(2014)는 이러한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단순한 관계 개선을 넘어서 조직의 구조, 리더십 방식, 의사소통 문화를 포함한 전면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신뢰는 '좋은 사람'에서만이 아니라 '좋은 시스템'에서 자란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시 신뢰를 회복할 것인가
신뢰는 단숨에 쌓이지 않는다. 하지만 회복은 가능하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고민하는 조직과 공동체에 다음에 제시하는 아주 작은 것들로 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다시 고민하고 살펴보자 권하고 싶다.
1. 역할과 정보 흐름을 명확히 하자
‘누가 무엇을 책임지는가’, ‘이 요청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를 명확히 하자. 설명이 빠질수록 추측이 많아지고, 그 추측은 오해와 반감을 낳는다. 정보 흐름을 설계하고 공유하면 권한을 나누는 것 같지만, 오히려 신뢰를 구축하는 자산이 된다. 이는 심리적 계약의 회복과도 연결된다.
2. 업무 지시가 아닌 요청의 언어를 연습하자
“이 일 좀 처리해주세요” 대신, “이 업무의 맥락은 이렇고, 당신의 판단과 실행이 필요해요”라고 말해보자. 업무지시가 아닌 책임과 판단을 위임하는 구조는 구성원의 동기와 자율성을 회복시킨다. 요청은 관계의 주도권을 나누는 행위이며, 조직 구성원을 ‘수행자’가 아닌 ‘파트너’로 인식하게 만든다.
3. 작은 약속을 지켜서 신뢰의 루프를 만들자
‘결과 공유하겠습니다’, ‘검토 후 말씀드릴게요’라는 작고 일상적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신뢰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작은 약속을 반복적으로 지키는 일상에서 회복된다. ‘서류상 실행한다’는 것도 시스템화한 업무에 대한 약속이행을 저버리는 행위이며 신뢰를 갉아먹는 방식이다. 이런 작은 약속들이 지켜질 때 조직은 예측 가능성을 회복하고, 구성원들은 진짜 작동하는 조직을 경험하며 다시 자신을 열기 시작한다.
신뢰는 의심과 방어의 시대에 가장 절실한 조직 자산이다. 팀원 간에, 부서 간에, 리더와 구성원 간에 우리는 서로에게 물어야 한다. “당신은 나를 믿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당신을 믿게 만들 수 있는가?”라고.
문학가 허먼 멜빌은 말했다. “신뢰란, 내가 마음껏 부서져도 괜찮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조직은 단절된 구조가 아니라, 연결된 존재다. 그리고 그 연결은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실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