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했습니다, 도망쳤습니다

by 괜찮은사람

5시 59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


“내일 뵙겠습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퇴근 인파에 몸을 실었다.
그저 흘러가듯 걷다가, 문득 들었던 질문.
“나는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은 걸까?”


피곤과 들뜸이 교차하는 퇴근길의 표정 속에서

문득 지하철 도어에 비친 내 얼굴은

그야말로 ‘없음’이었다.

존재는 있는데, 감정도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상태.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


가야 할 역은 한참 남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역에 덩그러니 남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그런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큰 길가에서 하나 들어간 골목.

모텔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불빛은 어둡고 간판은 낡았지만,

이상하게도 거기가 오늘 하루의 안식처처럼 느껴졌다.


“삐리릭-“


문을 열자 코끝에 살짝 락스 냄새가 스쳤고,

카드키를 넣자 TV와 에어컨이 요란하게 혼자서 작동했다.

가방을 아무데나 내려놓고 침대에 그대로 엎드렸다.

살짝 눅눅한 습기와 락스향이 왠지 안심되었다.


‘이대로라면 그냥 잠들어도 좋겠어’


누워서 혼자 떠드는 TV소리를 듣다가

아무데나 던져 놓았던 편의점 봉투를 끌어왔다.


삼각김밥 포장지를 뜯자 밍밍하지만 바삭한 김과

짭잘한 밥이 잠시나마 입 속에서 불꽃축제를 열었다.


성수기가 지난 바닷가 한 켠에서 파는

‘피유웅’하고 올랐다가 떨어지는 그런 폭죽처럼.


그날은 울지도 않았다.
그냥 눈도 감지 않고, 불도 켜지 않은 채
가만히, 이대로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알람 소리가 울렸고

낯선 천장을 보며 잠을 깼다.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평소와 똑같았다.


밖으로 나가자 큰 길가에 사람들이

바쁘게 출근길을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낯설었던 것도 잠깐, 인파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오늘의 서핑 목적지는 회사였다.


지난 밤은 어떤 숙박도, 휴식도 아닌
‘존재의 유예’ 같은 거였다.

누구도 내가 어디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게 서운했고, 편했다.


도망쳤다.
숨었다.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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