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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r 31. 2016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네팔 난민촌에 걸린 사진

네팔 포카라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숙소로 가고 있는데 뭔가 허전하다. 안경을 잊어버렸다. 버스에서 정신없이 일어나서 나오느라 안경을 떨어뜨린 것이다. 어두운 밤 안경까지 없으니 왠지 더욱 캄캄하다. 버스 정차장에 가서 찾아보았는데 내일 오라고 한다. 버스가 수백 대가 서있다. 아마 찾기 힘들 것 같다. 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경수가 전에 한번 왔던 숙소라 조금 더 싸게 예약할 수 있었다. 더 비싼 가격을 불렀는데도 싸게 해주었다. 네팔 사람들은 친절하고 정직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아무것도 제대로 못 먹은 우리에게 심플한 아침식사가 있었다. 숙소 바로 옆에 파는 이 간단한 식사는 안나푸르나를 보면서 여유를 즐기기에 충분한 식사였다. 그 기분이 마치 스위스 산맥에서 하는 아침식사와 같았지만 더욱 풍성하고 가격이 저렴한 탓인지 마음이 여유로웠다.  


정원에서 뒹구는 강아지를 보았다. 매우 행복해 보였다. 점심을 네팔 현지 음식점에서 먹었다. 가격이 매우 쌌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내리는 비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네팔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네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젯 저녁에 받은 충격이 큰 터라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녁에 산촌 다람쥐라는 한식당을 가게 되었다. 그곳 사장님이 한국분이었는데 한국으로 갔고 잠깐 다른 사장님이 계셨다. 참 좋으신 분이었다. 그리운 김치볶음밥 하나를 시켜놓고 사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네팔 사람들을 돕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였다. 사장님은 씨익 웃으시며 내게 적합한 곳이 있다고 했다. 한국인 수녀님이 운영하시는 작은 학교 같은 곳이 있으니 그곳에 가보라는 얘기였다. 전혀 기대치 못한 곳에서 길이 열렸다. 다음 날이 굉장히 기대되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사장님이 넌지시 던진 얘기가 생각났다. "근데 여기 왔으면 안나푸르나 보면서 패러글라이딩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작년 여름 스위스 체르마트에서 했던 패러글라이딩이 떠올랐다. 온몸에 흐르는 전율,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하는 그 감동이 기억났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패러글라이딩을 해!" 하지만 네팔에 온 목적을 다시 한번 기억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목적은 봉사활동이었다. 사실 그 문제 때문에 계속해서 신경 쓰이고 있었다. 패러글라이딩은 내게 있어서 자그마한 테스트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과감하게 포기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내일을 기다리며 숙소에서 잠들었다. 행복한 밤이다.


새벽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절로 눈이 떠졌다.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안나푸르나 산봉우리를 보고 싶어서였다. 일찍 일어난 새는 벌레를 잡는다고 했던가, 일찍 일어난 나는 맑은 하늘에 펼쳐져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볼 수 있었다. 산맥은 20분 정도 후에 구름으로 다시 모습을 감췄다. 부끄러움이 많아 보였다.


잃어버린 안경 탓에 안경점에서 안경을 맞추었다. 안경을 맞추러 갔는데 시력검사표가 없었다. 안경을 파는 아저씨는 내게 안경을 하나 주더니 저기 저 산봉우리가 보이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안 보여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다른 안경을 보여주더니 "이번엔 보여?"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잘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아저씨가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그건 이제부터 네꺼야!" 네팔 현지 물가가 싼 탓인지 안경도 쌌다.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정직한 네팔 사람들의 성격이 드러나기도 했다. 나는 한국 돈 3만 원에 안경을 새로 맞추었다.


안경을 새로 맞추고 다시 산촌 다람쥐로 향했다. 그곳에서 학교로 가는 차편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원래 있던 일행들에게 인사를 하고 마트에서 과자를 샀다. 학생들에게 나눠줄 과자를 사고 보니 왠지 마음이 흡족했다. 흡족한 마음으로 우리는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도착한 그곳에는 수녀복을 입은 수녀님이 계셨다. 그곳은 네팔 정부에서 난민촌으로 지정해 지진이나 다른 이유로 인한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는 곳이었다. 수녀님은 우리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며 환영해주셨다. 아이들은 주중에는 교육과정에 따른 공부를, 금요일에는 자유시간을 갖는데 이번에는 음악시간을 갖고 있었다. 교실(나름 강당)은 판자로 만든 아주 허름한 곳이었고 가운데 놓인 유리 테라스를 통해 교실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주 더운 날씨에  60명가량의 학생과 그를 지도하는 선생님들, 그리고 우리 일행이 같이 있자니 교실이 금방 찜통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빛은 덥기 때문에 짜증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교회학교의 어린이들처럼 뒤에서 장난을 치기도 하고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수업을 듣기도 했다. 우리를 환영하는 인사를 하고 수녀님은 아이들과 함께 '목마른 사슴'이라는 찬양을 불렀다. 한국어로, 네팔어로, 영어로 부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선 후기의 선교사님들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의 미래가 기대됐다.


수녀님이 운영하는 이 학교는 처음에 학교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학교가 있기 전에 이곳 난민촌에서 의료선교를 먼저 시작하였다. 이동식 병원과 같은 개념으로 네팔에 있는 상류층 사람들을 고치던 사람들이 네팔의 난민촌으로 와서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고 돌보아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사람들의 몸을 고쳐주는 것은  그때뿐이지만, 교육은 사람들의 의식을 계몽시키고 그 사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수녀님은 자그마한 창고에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신다. 그리하여 지금은 자그마한 강당과 시멘트와 판자로 만든 6개 정도 되는 교실 안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신다.


조선 초기의 우리 사회도 그러하였다. 폐허와 같던 곳에 왕의 진찰을 맡고 있던 의료선교사들이 지금의 정동, 상동, 종로와 같은 곳에 찾아가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주었다. 아펜젤러, 스크랜튼 등의 선교사들은 자신의 젊은 시절부터 모든 인생을 다 바쳐서 조선이라는 땅에 와서 사랑을 전하기 위해 봉사하고 헌신했다. 


선교사님들의 헌신은 최병헌, 서상륜, 신석구와 같은 민족 신학자뿐만 아니라 유관순과 같은 독립투사를 길러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교회는 당시에 일제의 억압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였다. 또 사람들을  노예화시키고 우민화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세뇌에 맞섰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속에 정의를 향한 불타는 저항 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네팔 난민촌에 있는 수녀님들의 학교를 보니 왠지 조선 초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래된 사진과 유물들로 밖에 보지 못하였지만, 100년 전으로 돌아가 조선의 모습을 본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 한 가지 주제로 여러 가지 나라와 장소를 다니면서 무언가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필름의 부피 때문에 많은 양의 필름을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작품을 만드는 데에도 부족한 양이었다. 그런데 문득 하나님께서 난민촌에 있는 아이들은 제대로 된 자신의 사진 한 장을 갖고 잊지 못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셨다. 내가 그 어떤 작품을 만들던 이 보다 귀한 작품이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작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주고 널리 이롭게 하는 역할을 갖지 않았던가. 나는 내게 있는 폴라로이드 필름을 난민촌에서 대부분 사용했다. 사진을 찍어줄 때마다 아이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신기하게 쳐다보는 눈, 낯선 여행객을 경계하는 눈, 쑥스러움을 타는 눈, 장난기가 가득한 눈, 한껏 흥분되어있는 눈, 천사와 같이 맑은 눈들이 한 명 한 명 나를 바라보았다. 순수한 눈, 더럽혀진 발, 사랑스러운 모습을 가진 그들은 모두 천사였다. 사진 찍는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동네 아이들이 학교로 몰려들었다. 필름이 충분하여 다행히도 그들 모두를 찍어줄 수 있었다. 사진을 찍는 장소는 수십 명이 한 공간에 있다 보니 매우 더웠다. 카메라가 땀으로 젖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곳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폴라로이드 장사를 하면서 장사가 잘될 때 주머니에 가득 찬 돈을 보고 기뻐했었다. 그래서 고민이 됐다. '돈은 이렇게 내게 기쁨을 주는구나. 내게 있어서 돈은 그 무엇보다도 큰 존재구나.'

근데 이번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찍어주면서 느낀 것은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던 때보다도 이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줄 때가 훨씬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사랑은 돈이 줄 수 없는 행복을 가졌다. 그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찍은 사진들은 학교 강당 벽에 걸린다고 했다. 아이들이 각자 가져가는 것보다는 학교에 한 번이라도 더 와서 자신의 사진을 볼 수 있게 한다는 취지였다. 다음에 네팔에 왔을 때는 그 사진들을 보러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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