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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r 31. 2016

풀리지 않는 숙제

신학교 4학년을 졸업하는데 솔직히 삼위일체가 안 믿어진다.

신학교 4학년을 졸업하는데 솔직히 삼위일체가 안 믿어진다. 교회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 세 존재가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이다.'라는 것을 믿는데 나는 수십 권의 신학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발표를 해도 이게 솔직하게 말해서 안 믿긴다. 이 교리 때문에 수억 명의 사람들이 서로 전쟁을 일으켜서 죽고 싸우는 역사가 2천 년 동안 지속되어왔다. 권력자들의 욕심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나 뿐만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빈, 웨슬리, 본 회퍼, 칼 바르트 등과 같이 천재라고 불리는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증명하지 못했던 것을 내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천재들이 다 증명 못했으니까 너도 증명 못할 거야. 남들이 믿으니까 너도 그냥  믿어!"라고 강요받는 것은 너무 싫었다. 그래서 삼위일체 논쟁이 시작된 곳을 직접 여행해보기로 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는 신인가 인간인가? 처음에는 각자 의견을 갖고 얘기를 하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로 공인된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통일성을 가질 필요가 생겼고 여기저기서 각자의 지역을 대표하는 교부들이 예수님은 누구인가에 대해 토론을 하기 시작한다. 토론은 크게 두 가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와 예수님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로 나뉜다. 

A.D 325년, 니케아(지금의 이즈니크)라는 곳에서 서로 결판을 짓기로 하고 황제의 주관 아래 공의회가 열린다. 그것이 바로 최초의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이다.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터키의 이즈니크라는 곳으로 버스를 타고 향한다. 버스는 수시간을 달리더니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버스에서 내려 배 갑판으로 나와 햇살을 즐긴다. 어디선가 갈매기 날아와 사람들에게 빵부스러기 동냥을 한다. 빛나는 태양, 일렁이는 물결, 스쳐가는 바람, 내리쬐는 햇살. 지금 건너는 이 바다는 아리우스가 건넌 바다였겠구나.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며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자신의 신앙을  관철시키는 데에 성공을 기원하며 이 바다를 건넜을까. 빛나는 태양처럼 자신의 믿음이 만민 앞에서 빛나기를 기도하며 건넜을까. 일렁이는 물결은 갈릴리 호수의 물결과도 같고 따가운 햇살은 평화롭기만 하다. 이 바다를 건너면 폭풍이 몰아칠 줄 누가 알았으랴. 풍랑이 되어 그들을 집어삼킬 줄 어떻게 알았으랴. 풍랑으로 내모는 예수님의 마음을 몰랐던 제자들처럼 아리우스 또한 그러했을까.

아리우스는 예수님을 폄하할 생각이 없었다. 단지 그가 믿는 예수님은 그에게 있어서 철저히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다 보니 예수님의 위치가 낮아졌다. 적어도 나의 위치를 드러내려다 보니 하나님의 위치가 낮아지는 나보다는 아리우스가 백번 낫다. 그는 목숨을 걸고 비장한 마음으로 이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내가 죽던지 네가 죽던지 한판 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세월의 바다에서 아리우스는 하나의 부서지는 파도였다. 배는 지나가고 파도는 부서진다.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언젠가 우리도 파도가 되어 흩어진다. 나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거는가. 아리우스의 마음을 공감하려 글 한번 써보지만 끝내 이렇다 할 영감은 얻지 못하고 강한 햇빛에 피부만 까맣게 탄다. 이 바다를 건너가서 저기 도착할 쯔음에는 무언가 알 수 있을까.


이스탄불에서 이즈닠으로 바로 가는 버스 시간대가 늦어서 오랑가즈역에서 미니버스로 갈아타기로 했다.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떤 아저씨가 나를 보고 꼬레아? 하더니 인삼촼허릿을 달라고 했다.

터키에서 인삼 촼헐릿이라니. 아저씨는 내게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인삼 홬헐릿을 달라고 했다. 내가 인삼 촼헐릿이 없다고 하자 아저씨는 급실망한 마음으로 내게 "내 마음이 부수어졌어"라고 말했다. 구글번역기로 돌려서 그런지 더 어색한 표현이었다. 이어서 아저씨는 내게 "그러면 라면은 있어?" 라고 말했다.

 
이 아저씨 뭐하는 아저씨 일까. 땡큐라는 말 한마디도 어눌하게 하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 여행을 왔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참 신기했다. 나는 네팔 마트에서 산 튀김우동 컵라면을 선물해주었다. 아저씨는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내게 땡큐땡큐를 연발했다. 귀여운 아저씨다. 알고보니 이 아저씨는 이 버스 회사 직원이 아니라 그냥 직원 대타로 잠깐 앉아있는 아저씨였다. 나는 핸드폰 충전을 부탁하고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즈니크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난 교회를 다니고 신학을 공부한다. 그런데 삼위일체가 안 믿어진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놓고 회의를 했던 니케아(이즈니크)에 여행을 왔다. 이곳에는 정답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들어온 건물은 생각보다 초라하고 아담했다. 입구에서부터 성큼성큼 발을 옮긴 나는 실망에 빠졌다. 과연 이 공간이 그 유명하다던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논쟁이 벌어진 곳이 맞는가? 황제가 앉기에 너무나도 부족해 보이는 이 곳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작고 아담하다.

유리막으로 보호되어있는 두개의 공간이 있다. 하나는 심문석과 같아 보이고 또 하나는 반원형 모양의 회중석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어느 공간도 어른들이 앉아있을 만큼 큰 공간은 없다. 이 정도 규모라면 성인 100명 안팎의 인원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앞에 있는 무대에는 황제와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이 셋이 서있는 그림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입구에서 바라보았을 때 정면으로 보이는 큰 돔과 그 양쪽으로 나 있는 공간이 보이는데, 이 공간에는 성화가 그려져 있다. 굉장히 많이 훼손되어서 그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이지만 분명히 저것은 성화이다. 건축양식의 모양도 로마에서 보았던 벽돌로 만든 아치형이 틀림없다. 곳곳에 로마의 흔적이 보인다. 지금 이곳은 이슬람 회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슬람은 그림을 우상이라고 생각하여  그리게 하는데 예외로 꽃 그림이 많이 그려지고 있다. 꽃은 천국을 상징한다. 이러한 꽃무늬 모양이 건물 여기저기에 그려져 있음을 찾을 수 있다.


건물 입구와 왼쪽 뜰 밖에는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 성당의 바닥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니케아 공의회가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라는 상징성이 굉장히 커서였을까 이 공간이 매우 작게 느껴진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처음이었기에 이렇게 작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의 첫 단추는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크고 위대한 작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연설을 토해내듯 사람들을 설득하고 황제에게 자신의 믿음을 선포하는 엄청나게 규모가 큰 자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300년 전, 팔레스타인 청년 예수라는 사람이 신이냐 인간이냐를 놓고 공적인 장소에서 토론을 하는 것은 황제도 생소했고, 교부들도 생소했다. 서로가 처음이었기에 작은 것부터 시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작은 불이 번져 큰 산을 태운 것처럼 그들은 작은 논쟁에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큰 논쟁으로 번지고 갈라지는 계기가 되진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건물 안 돌계단에 앉아 글을 쓰고 있자니 사람들이 한두 명씩 드나든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오지 않고 가족 단위로 2명에서 5명 정도가 드나든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기도하러 오는 사람이 한 명씩 생긴다. 아랍어로 쓰인 간판에 절을 하고 기도를 한 뒤 조용히 나간다.


무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법정이 떠오른다. 판결하는 사람과 죄인이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 떠오른다. 동시에 사람이 사람을 불러다 놓고 사람의 얘기를 판결하는 것을 기초로 교회의 불변의 질서가 세워졌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삼위일체가 더더욱 믿어지지 않는다. 아니 이쯤 오면 믿어질 줄 알았는데 심히 당황스럽다.


솔직히 사진 몇 장 올려놓고 그럴싸한 글로 이제는 내가 삼위일체를 믿게 되었노라고, 실제로 현장에 와보니 성령의 능력이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아타나시우스가 이기게 되었고 삼위일체의 기본이 성립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안 믿어지는 걸 어떡하나. 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더 나아가 니케아 신조를 외우던 약 100명의 사람들이 조직적이고 정치적으로 이곳에 모여서 황제와 함께 교회의 초석을 논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또한 든다. 생각해보니 이곳은 그럴만하기도 한 곳이다. 각자가 믿는 것을 주장하고 황제가 판결을 내리는 곳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공의회의 현장이 아닌 그들이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삶의 현장을 가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믿는 삼위일체는 절름발이 삼위일체다.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낸 야훼 하나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고치시고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릴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성령님. 이 3개가 따로는 믿어지는데 서로 중첩되는 그 어느 부분에선가 자꾸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생각하게 된다. "에이 정말로?" 


삼위일체는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와있지  않을뿐더러, 후에 사람들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만든 교리라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삼위일체는 어느 순간 뿅 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목적만으로 만들어졌다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희생과 목숨을 건 사투들이 있었다. 실제로 니케아 공의회에 참여했던 양쪽 진영 모두 예수를 믿다가 팔과 다리가 잘리고 눈을 뽑히는 등의 형벌을 받아서 불구가 된 사람들이 80퍼센트가 넘었다고 한다. 그들의 신앙은 그만큼 순수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삼위일체를 위해 목숨을 바쳐 살았던 그 사람들의 삶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궁금하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르면 설명하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알면 횡설수설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삼위일체를 어설프게 안다. 설명의 한계가 오면  '신비'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그게 적당히 편하다. 삼위일체라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당시에 널리 유행했던 것이라서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해서 삼위일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이해를 위한 교리가 아니라 사고하는 과정 가운데 믿음이 성숙하고 건강한 사색을 하는 게 목적이라면 삼위일체는 굉장히 성공적이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를 사랑이란 키워드로 풀어냈.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성령님이 사랑으로 함께하신 다는 것이이를 수업시간에 들은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이쯤 되면 나는 머리가 나쁘거나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 분명하다. 근데 나는 어거스틴이 한 말을 들었을 때  말장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해결되지 않으니까 아름답게 포장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어투 말이다. 그 말에 나는 모욕감마저 느꼈다. 어거스틴 나쁜 놈.


아! 도대체 왜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는 그렇게 이곳에서  치고받고 싸웠을까. 이제 해가 저물어간다. 얼마나 앉아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엉덩이가 저릿하고 다리에 피가 쏠린다. 결국 난 여기서 답을 얻지 못했다. 다만 하나 얻은 게 있다면 삼위일체를 살아내려고 했던 그 삶의 현장. 그곳에 왠지 해결의 열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답답한 가슴 부여잡고 아야 소피아를 나온다. 부디 건물 이름처럼 내게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기를. 마지막으로 공의회에서 우리가 이렇게 믿기로 하자 라고 약속한 '사도신경'을 큰 소리로 외쳐보고 가려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굉장히 이상하다. 교회 다니면서 주기도문 다음으로 수천번을 외웠는데 너무 낯설고 가슴이 뛴다. 이 이상한 기분은 무엇일까.

다시 사도신경을 외워본다. 단어 하나하나씩 쉬엄쉬엄 또박또박 읊조려본다. 단어를 말하면 말할수록 수천번 수만 번 고민해서 적어놓은 듯한 담백한 느낌이 든다. 건물 안의 울림이 내 가슴을 울린다. 명치 쪽이 간지럽게 웅웅거린다. 이상하다.


이상한 기분과 해결되지 않은 아쉬움이 가득 찬 채 숙소로 돌아왔다. 속 시원하게 해결해버리고 싶었지만 삼위일체는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 아마 이 숙제는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숙제는 풀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답답한 기분은 풀렸다. 삼위일체는 머리로 이해되지 않지만 삼위일체를 믿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삼위일체가 믿어지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갖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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